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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하의 본초여담] 코피가 멈추지 않자 〇〇즙을 갈아 마시니 바로 그쳤다

정명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2.07.09 06:00

수정 2022.07.12 10:27

[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약초의 치험례를 바탕으로 이것을 이야기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본초강목에 그려진 연과 연근
본초강목에 그려진 연과 연근

먼 옛날 노령의 관리가 한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할 것을 명하는 교지(敎旨)를 받았다. 그런데 자신의 고향에서 너무 먼 고을이라 망설임이 있었다. 부임 날짜는 만 하루 후였는데, 보통 그곳까지 간다면 넉넉잡고 이틀이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관리는 청렴하게 살아 말이 없었고, 말을 빌린 만한 돈도 없었다. 그러나 이미 교지를 받은 터라 어떻게든지 발길을 재촉해야 했다.


관리는 젊은 하인 한 명과 함께 바로 채비를 해서 길을 떠났다. 가능한 빨리 가야해서 짐은 봇짐 하나로 줄였고, 먹을 것은 각자 주먹밥과 호리병에 담긴 물만 준비했다. 계절은 늦가을로 날씨는 그렇게 덥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관리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편한 길보다는 산길을 첩경(捷徑)으로 삼았다. 달도 점차 오르고 있어서 밤길도 무난했기에 관리와 하인은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길을 재촉했다.

관리는 죽을힘을 다해 길을 왔기에 다행스럽게 임명된 날짜에 맞춰서 고을에 도착했다.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었고, 팔다리는 후들거렸지만 그래도 부임식을 그럭저럭 마쳤다. 관리는 부임식 후 저녁도 마다하고 골아 떨어졌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사단이 벌어졌다. 관리가 아침에 코가 답답하고 숨을 쉬기 힘들어 눈을 떴는데, 누었던 침소에 머리맡에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던 것이다. 바로 '코피'였다.

코피는 좀 그치는 듯하다가 다시 나기를 반복했다. 곧바로 관청의 의원이 약방문을 처방했으나 코피는 멈추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3일째 코피가 났다. 이 소식은 하인을 통해서 관리의 고향에 전해졌다. 하인은 부랴부랴 관리의 고향으로 달려 가족에서 병고(病告)를 전했다. 관리에게는 형이 한 명 있었는데, 이 형은 당시 명망이 있는 학자로 사서삼경에서부터 의서까지 현존하는 모든 서적만을 읽으면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이었다.

형은 하인에게 급히 서찰을 보냈다. “아우님, 병고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네. 급히 연근을 즙을 내서 마셔보시게. 의서에 보면 생연근즙을 우즙(藕汁)이라고 했는데, 우즙은 토혈(吐血)을 멎게 하고 어혈(瘀血)을 삭힌다고 했네. 아마도 늦가을, 노령의 나이에 이틀 길을 하루 만에 이동하면서 혈열망동(血熱妄動)한 결과로 생각되네. 생지황을 즙을 내서 고를 내서 먹어도 좋지만, 지황고는 만드는데, 3일 밤낮으로 뽕나무 장작으로 다려서 다시 하루를 차가운 우물물에 담궈서 식힌 다음 먹어야 해서 만드는데, 일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라 지황고는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일세. 내 곧바로 하인에게 마을 연못에서 바로 채취한 실한 연근 10근을 보내니 받자마자 절구에 찧어 즙을 내 마시도록 하시게.”라는 내용이었다.

하인은 연근을 등에 짊어지고 서찰과 함께 바로 전달을 했다. 관리는 그 서찰을 읽어보고 고마운 형님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데 사실 형님은 의원이 아니였고 관청에는 담당 주치의 의원이 있던 터라 의원에게 먼저 서찰을 보여준 후 연근즙을 먹어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의원의 대답은 달랐다. “형님이 알려준 내용은 약방문이라 하기에는 떠도는 가정요법에 불과한 것입니다. 해당 내용은 저 또한 익히 의서를 통해서 알고 있지만 자칫 치료시기를 놓치고 부작용 또한 생길 수 있으니 경계해야 합니다. 그 서찰은 접어 두시고 다시 제가 저만이 알고 있는 비방(祕方)을 하나 올린 터이니 복용해 보시지요.”라고 답한 것이다. 의원의 말은 그 자체로 들어보면 맞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의원은 목적은 다른데 있었다. 의원은 이렇게라도 자신이 처방을 많이 해야 그 댓가로 돈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였다. 그래서 원방(原方)의 선택은 적중했을지라도 여기에 쓸데없는 돈 될만한 갖가지 약재를 넣은 터라 결국 잡방(雜方)이 되었고, 약효는 송곳처럼 예리하지 못하고 목검처럼 무뎠다. 의원의 처방을 복용한 관리의 코피는 멈추는 듯하다가 다시 나기 일쑤였다.

관리는 자신의 코피가 여전하자 의원의 처방에만 의존할 수 없던 터라 결국 형님이 알려준 방법대로 해 보고자 결심했다. 어느 날 밤 몰래 함께 기거하고 있는 하인에게 연근의 즙을 내서 가려오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연근즙을 한번에 한사발씩 하루 3차례 마셨다. 그런데 코피가 나는 횟수가 조금씩 잦아들더니 양도 줄기 시작했다. 그렇게 3일째 되는 날에는 코피가 전혀 나지 않고 코피와 함께 지속되던 상열감과 갈증도 사라졌다. 희한하게도 몸도 가벼워지고 머리도 맑아졌다.

관리는 자신의 코피가 멎었다는 기쁨이 있었지만 동시에 서글픔 또한 있었다. 관리는 형님에게 서찰을 적었다. ‘형님의 방법대로 해서 제 코피가 나았습니다. 관청의 의원에게 물어본바 경계하라고 했기에 잠시 머뭇거렸는데, 이제야 복용하고 낫게 됨에 죄송하고 감사드립니다. 세간의 의사들을 보면 매번 묘한 처방이라는 식으로 현혹하고 혹은 원방의 처방 내용을 고쳐서 자신의 처방인 것처럼 환자를 속이고 상술에만 관심이 있으니 애석합니다. 이제 저는 건강이 회복되었으니 걱정마시고, 형님도 너무 독서에만 열중하지 마시고 건강을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다.

관리는 관청의 의원을 불렀다. 의원은 관리의 코피가 멎었다는 소식을 익히 들어서 자신에게 포상을 내리려나 보다 하고 들뜬 마음으로 입청했다. 그러나 관리로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듣고 나니 얼굴이 벌게졌다. 그러더니 사죄를 올리며 “나으리~ 제가 너무 자만하고 돈 욕심이 앞섰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더더욱 환자의 편에서 더욱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처방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일은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물러났다.

그날 밤 의원은 하릴없이 의서를 한 권 꺼내어 펼쳤다. 그런데 우연히 한 페이지가 펼쳐져 눈에 들어왔다. ‘지금 의사를 빙자하는 자들은 대개 이름만 믿고 값을 올리며 마음을 쏟아 연구하고 익히지 않는다. 헛된 명성에다 목숨을 맡기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무릇 의사란 어질고 자애로운 사람이 아니면 부탁할 수 없고 총명하고 노련한 사람이 아니면 맡길 수 없으며 청렴하고 순수한 사람이 아니면 믿을 수 없다.’라는 내용이었다. 눈은 글을 읽고 있는데, 마치 하늘이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귀에도 들려 왔다.

어느 날 서당에서 글공부에 전념하는 와중에 코피가 난다는 아들을 데리고 의원을 방문한 부인이 있었다. 부인은 소문대로 아들에게 연근을 쪄서 간장에 졸여 장아찌처럼 늘 먹였지만 효과가 없었다고 했다.

의원이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연근이 코피에 효과를 내려면 생연근이여야 합니다. 만약 연근을 익히게 되면 코피나 출혈에는 효과가 없습니다. 생연근은 성질이 서늘하면서 지혈(止血)하는 효능이 있다면, 익힌 연근은 성질이 따뜻해지면서 보하는 효능으로 바뀌게 됩니다. 만약 아들이 평소 열감을 많이 느끼면서 과로를 할 때면 코피가 난다면 다시 한번 생연근의 즙을 내서 먹여 보도록 하시오. 이 아들에게는 내 약방문이 필요치 않을 것 같소. 연근즙이 오늘 내 약방문이요.” 다행스럽게 부인의 아들의 코피도 수일내로 진정이 되었다.

연근즙이 코피에 좋다는 소문에 연근즙을 마셔봤지만 그래도 코피가 멎지 않은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의원은 이들에게만은 별도로 약방문을 처방했다. 그 경우 코피의 원인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었다. 의원은 항상 환자 편에서 어떤 치료방법이 가장 효율적일까 만을 궁리했다. 군신좌사(君臣佐使)를 어우르는 제아무리 복잡한 대방(大方)이라 할지라도 적중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고, 흔한 약재 몇 개로만 구성된 하찮아 보이는 소방(小方)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명(命)을 되살리는 효과가 있음을 깨달았다.

약방문을 처방할 때에는 과거와 달리 비싼 약을 처방하지 않으면서도 꼭 필요한 약재만을 활용하니 환자들은 부담이 적어졌고 효과 또한 날카로운 칼로 베는 것 같았다. 때때로 부작용이 적으면서도 효과적인 가정요법만을 제시하게도 했다. 의원의 약방은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관리의 코피 사건으로 인해 결국 인술(仁術)을 베푸는 명의(名醫)라는 소리까지 듣게 된 것이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외과정요> 昔趙公宣教字季修, 來宰龍泉, 兼程而進, 患鼻衄, 日出數升. 時家兄教以服藕汁, 地黃膏. 趙叩諸醫, 云 此爲戒服之劑. 乃數易醫無效. 家兄陰餽前汁, 服三日而疾愈. 兄曰 此印前所獻之方. 趙驚嘆曰 向非醫者譎計以惑我. 早信此方, 豈久受此困耶. 今以屢試屢驗, 不可易者.(예전에 이름은 선교요 자는 계수인 조공이 용천에 수령으로 부임할 때, 이틀 갈 거리를 하루에 나아가느라 코피가 나서 하루에 코피가 몇 되나 나왔다. 당시 집안의 형이 연근즙과 지황고를 먹어보라고 알려 줬다. 조공이 여러 의사들에게 물어보자 복용을 경계해야 할 약이라고 했다. 마침내 여러 번 의사들을 바꾸었으나 효험이 없었다. 그러다가 형이 앞서 말한 즙을 몰래 보냈더니 3일간 복용하고 병이 나았다. 형이 ‘이는 바로 전에 바쳤던 그 처방이다’하자, 조공은 놀라서 탄식하며 ‘지난번에는 의사같지도 아닌 자들이 속임수로 나를 미혹시켰구나. 진작 이 처방을 믿었더라면 어찌 오랫동안 이 괴로움을 받았겠는가’ 하였다. 이제 여러 번 시험해서 효과를 보았으니 바꿀 수 없는 것이다.
)
<동의보감> 生藕汁. 消瘀血, 能止一切出血. 取汁飮之.(생연근즙은 어혈을 없애고 모든 출혈을 멎게 한다. 즙을 내어 마신다.
)
<식품집> 藕節, 搗汁, 主吐血衂血.(연뿌리를 찧은 즙은 토혈과 코피에 주로 쓴다.)
pompom@fnnews.com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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