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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스트리트] 안창남 비행 100주년

손성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2.08.25 18:16

수정 2022.08.25 18:16

안창남의 고국 창공 최초 비행 100주년을 맞아 국립항공 박물관에서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국립항공박물관 제공) /사진=뉴스1
안창남의 고국 창공 최초 비행 100주년을 맞아 국립항공 박물관에서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국립항공박물관 제공) /사진=뉴스1
1922년 12월 10일 서울 여의도 비행장. 한강의 칼바람을 맞으며 5만여 서울시민이 활주로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윽고 단발쌍엽(單發雙葉), 즉 엔진 하나에 복층 날개를 가진 1인승 '금강호'가 하늘로 솟구쳤다. 조종사는 약관 21세의 안창남. 한국인이 최초로 조국의 창공을 비행한 순간이었다. 서울 인구가 22만 정도였으니 시민의 4분의 1이 이 광경을 보려고 모인 셈이다.


금강호는 남산과 창덕궁을 돌아 여의도로 돌아와서는 고공 묘기를 선보였다. 안창남은 식민지 조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청춘가를 개사한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라는 노래가 들불처럼 번졌다. "내가 어떻게 몹시 그리워했는지 모르는 경성의 하늘! 내 몸은 그저 심한 감격에 떨릴 뿐이었습니다." 안창남은 1923년 1월 '개벽'에 '처녀비행'의 심정을 이렇게 썼다.

안창남은 1901년 서울 평동에서 태어나 휘문고보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0년 도쿄 오쿠리비행학교를 졸업했다. 이듬해 5월 일본 최초의 비행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1등이었다. 도쿄~오사카 왕복 비행대회에서 또 1등을 했다. 조종실력은 일본인들을 압도했다.

안창남은 우리나라 최초의 조종사는 아니다. 1919년 중국 육군항공학교 조종사 훈련과정을 수료한 서왈보(1886~1926)가 최초라고 한다. 그는 중국 군벌의 조종사로 일하다 의열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안창남도 뒤를 따랐다.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을 탈출해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 대한독립공명단원으로 활약하며 일본군 진영에 폭탄을 투하하기도 했다.

영웅박명(英雄薄命)이랄까. 안창남은 불의의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떴다. 1930년 4월 2일 비행교육 중 추락한 것이다.
이역만리 타국에 묻혔지만 묘를 찾지 못하고 있다. 2001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안창남의 고국 비행 100주년인 올해 영화 상영회 등의 기념행사가 잇달아 열리고 있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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