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그들이 하루하루 깎고 깬 것은 세상이 정해놓은 '편견과 한계' [Weekend 문화]

조용철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2.10.21 04:00

수정 2022.10.21 03:59

K-스컬프처와 한국미술 (14) 1세대 여성 조각가 남성 조각가도 흔치 않던 1970~80년대 추상조각 개척자의 길 걸은 故 김정숙 故 윤영자는 파리·로마 등 해외서 활동 특유의 열정과 유대감, 후배양성에 기여
1974년 한국여류조각가회 창립모임. 오른쪽부터 김정숙 초대 회장, 이양자, 유영준, 윤미자, 진송자. 김윤신, 윤영자, 최효주 한국여류조각가회 제공
1974년 한국여류조각가회 창립모임. 오른쪽부터 김정숙 초대 회장, 이양자, 유영준, 윤미자, 진송자. 김윤신, 윤영자, 최효주 한국여류조각가회 제공
김정숙 '비상'1986년작 (브론즈, 69×112×21㎝) 안태연 제공
김정숙 '비상'1986년작 (브론즈, 69×112×21㎝) 안태연 제공
선과 악의 구분과는 다른 견지에서 여성 작가들은 팥쥐라는 얘기가 있다. 가부장적 시대에 아버지의 친자가 아니고 계모의 딸이었던 팥쥐는 세상을 냉소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태생적 특성이 있다. 팥쥐의 투한(妬悍)한 성격은 실권을 가진 어머니로부터 부여받은 유만부동한 권력과 열등한 존재감이 충돌하여 생긴 이중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세상만사를 순하게 순응하는 인간이 아닌 '왜'라는 의문과 반항 욕구가 있는 일종의 철학자 근성을 지닌 캐릭터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여성 조각가들은 이러한 팥쥐와 유사하다. 예술가라는 고매한 타이틀을 지녔으나 유리천장을 열고 온전히 K-스컬프처 일원으로 세상에 나아가기 위해 오늘도 세파와 맞서고 있다.
화장을 지우고, 설거지 수세미를 내려놓고, 보채는 아기의 젖병을 내려놓고 일상의 틈을 찾는 일을 반복한다.

삶이 곧 예술이고 예술이 곧 삶이 되는 여성 조각가들은 하루하루 진흙탕물 아래서 갈퀴질하는 백조처럼 사회 통념, 육체적 한계 등 온갖 세환(世患)을 헤쳐 나아가고 있다. 세상이 기대하는 현모양처 콩쥐 캐릭터를 뒤로하고 인고의 길, 예술가의 길을 택한 딸 팥쥐는 고집스러운 만큼 고독하고 외롭기도 하다.

서양에서는 1970년대 페미니즘이 활발히 떠올랐지만, 우리나라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80년대 후반이다. 한국 여성 조각가들의 활동은 이보다 이른 시기에 태동하였다. 1세대 조각가로서 1950년대 한국 초기 추상조각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었던 고 김정숙(1917~1991)은 미국 유학파로 조각이라는 영역이 남성들에게조차 생소하던 시기에 홍익대 모교로 돌아와 후학양성과 작품 활동에 힘썼다.

또 1974년에 여성 조각가들의 둥지가 되어준 '한국여류조각가회'를 창립하여 차별에 대해 여성 조각가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여성 자신들의 활동에 스스로 한계를 짓는 소극적인 태도에 문제의식을 성토하며 변화와 발전을 모색했다. 이는 한국미술계에 여성주의 의식이 싹트기 이전부터 조직을 이루고 생존과 도약의 몸부림을 시작하였다는 뜻이다.

김정숙과 함께 1세대 여성 조각가 양대 산맥을 이룬 고 윤영자(1924~2016)는 추상과 구상의 교차지점에서 자신만의 기품있는 작품세계를 추구했다. 목원대에서 가르침을 전했으며 한국여류조각가회의 2대 회장을 역임하는 동안 해외여행도 자유롭지 못할 시기에 파리, 로마 등에서 해외교류전을 개최하며 여성 조각가들에게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어줬다. 또한 '석주미술상'을 창설해 현재까지도 후진들에게 큰 힘을 주고 있다. 1세대 여성 조각가들의 선구적 활동을 이어받은 수많은 여성 조각가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지지하며 오늘날의 괄목할 만한 여성 작가들을 배출하게 됐다.


과거 1세대 페미니즘 사상의 열망과 동기부여가 된 '천부인권(天賦人權)'은 21세기에 흐려진 눈썹 문신처럼 자국만 남고 오롯하게 궐기의 사유가 되지 못하게 된 현실에서 여성 조각가들은 새로운 세계에 어떠한 화두로 K-스컬프처를 이끌어 나아갈까. 페미니즘이라는 담론의 포장 없이도 베넷 정체성은 작품에 스며 나온다. 멍울지고 참기 힘든 통점을 약보다 더 신묘하게 낫게 해주는 우리네 어머니의 약손이 있듯이 여성 조각가들의 손에서 창조된 작품에는 통곡의, 환희의 혼이 함께하고 있다고 본다.


'페넬로페의 베 짜기'처럼 창조와 파괴의 양면을 다 가진 여성, 어머니에게서 딸로 그 딸이 다시 어머니가 되어 딸에게 전해진 본성이라면 얼마나 창조적이며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세계일까. 여성 조각가들의 손끝에서 비롯되는 차고도 뜨거운 작품들이 넋두리 후 개운함처럼 한(恨)을 흥(興)으로 전환해 K-스컬프쳐를 이끌고 세계 무대에서 빛을 발하길 기대한다.

김하림 조각가·아트플랫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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