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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마지막 길을 닦아두다 ['장수 박사' 박상철의 홀리 에이징]

조용철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2.12.22 18:03

수정 2022.12.22 18:03

Weekend 헬스
(13) 백세인의 능동적 사생관
수의·관·노잣돈 미리 마련… 직접 떠날 준비하는 백세 노인들
10만원 든 붉은 복주머니 곁에 두고
단정한 모습 유지하려 매일 용모 점검
미리 짜둔 관, 집 대문 앞에 세워두고
썩지 않도록 자식들이 기름칠 관리도
삶의 마지막 길을 닦아두다 ['장수 박사' 박상철의 홀리 에이징]
삶의 마지막 길을 닦아두다 ['장수 박사' 박상철의 홀리 에이징]
세모(歲暮)가 되면 스산한 마음이 든다.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지난 날에 대한 아쉬움과 다가오는 날에 대한 불안으로 해가 넘어가는 경계에서 어수선해지기 마련이다. 이런 즈음에 동료 교수의 부음이 들려왔다. 40여년 전 우리 젊은 날 학문 발전을 위해 의기투합하여 연구소를 설립하고 새로운 학회를 창립하는데도 함께 했던 동료였다. 특히 다재다능한 고인은 노래방을 서먹서먹해 하던 나에게 윤항기의 '장미빛 스카프'와 몇몇 노래를 가르쳐주며 다른 동료들과 어울리도록 이끌어준 잊을 수 없는 친구였다.

퇴직 후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갑작스런 부음을 들어 그립고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했다.
암으로 투병했지만 마지막에는 큰 고통없이 떠났다는 미망인의 말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로하고 천국으로 편안히 가기를 기원하면서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됐다.

인류에게 죽음은 결코 종말이 아니었다. 삶의 연장선상에서 아득한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떠나는 과정으로 죽음을 이해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죽은 자의 망령은 죽음의 신인 하데스가 있는 명계로 인도된다. 그러기 위해서 생자와 사자를 가르는 스틱스강을 건너려면 뱃사공 카론에게 뱃삯을 지불해야만 했다. 생전의 소행에 대한 재판을 받아 선한 사람은 엘리시온(Elysion)에서 지복의 생을 영위하지만, 대부분의 망령은 부조화의 들판에서 방황하고, 극악한 자는 나락으로 떠밀려서 영원한 고통을 당한다고 상상했다.

중국에서는 망자를 위해 지전을 태우고,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염라대왕의 명을 받아 죽어야 할 자를 저승으로 안내하는 저승사자에게 노잣돈을 주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흥미롭게도 백제 무녕왕릉에서도 땅의 신에게 바치는 망자의 묘지대인 동전 꾸러미가 발견됐다. 죽음의 노잣돈 개념은 이집트, 그리스, 로마, 중국 등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깃들어있는 장례 풍습이었다.

이와 같이 노잣돈을 준비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문화는 인간이 죽음을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증거다. 노잣돈을 챙기고 자신이 묻힐 관(棺)을 마련하고 죽을 때 입고 갈 수의(壽衣)를 준비하면서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백세인들을 만나면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전남 담양읍 최씨 집성촌에서 105세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4남2녀를 두었는데 큰며느리는 노쇠하여 광주에 있는 딸네집에 살고 있어 큰손주며느리가 모시고 있었다. 백세가 넘도록 자기관리가 철저하였으며 성격도 괄괄하고 배포도 큰 마을 부녀회장을 지낸 분이었다. 증손자와 꼭 100살 차이가 나는 할머니는 매월 손자 손부 증손자에게 5만원씩 용돈을 주었다. 배우지 못하여 한글을 읽지 못했던 할머니는 손주가 학교에서 가져온 앨범을 보기 위해 예순이 넘어 독학으로 한글을 깨우쳤다는 의지의 인물이었다.

지금은 기동이 불편하여 누워있는 할머니의 머리맡에 붉은 복주머니가 있었다. 무엇이냐고 묻자 "저승길 노잣돈 주머니"라고 했다. 주머니에는 10만원이 들어 있었다. 손주며느리는 할머니가 노잣돈 주머니와 빗, 거울, 수저 그리고 신발을 소중하게 간직한다고 했다.

할머니는 노잣돈을 스스로 준비해두고 매일 점검하면서 항상 거울을 보며 단정하게 머리를 빗으며 언제 죽을지 모를 날을 기다리며 깨끗한 모습으로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죽음을 기다리면서 몸을 정화하며 길 떠날 준비를 하는 할머니의 태도는 바로 인간 삶의 거룩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전남 곡성군에서 찾은 백세인의 집 대문 안에 들어서자 윤이 나는 관 비슷한 것이 세워져 있었다. 무엇인가 물었더니 바로 관이라고 하였다. 어르신이 칠십이 되었을 때 마침 뒷산에 좋은 나무가 있어 아드님이 관을 짜서 준비해두었다고 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흘러 관이 썩지 않도록 매년 관의 안팎을 기름칠해 두고 있었다. 백세인은 자식들이 자신의 관을 소중하게 관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만족해 한다고 했다.

더욱 놀라운 경우는 전북 진안군에서 만난 107세 할머니의 경우다. 자식들이 할머니 나이 육십이 되었을 무렵 좋은 목재가 있어 관을 짜두었는데 20년이 지나 썩어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자식들이 이번에는 석재로 관을 다시 만들어 숨겨놓지 않고 곳간 옆에 놓아두었다. 죽으면 들어갈 관을 가족들이 모두 보는 자리에 두고 담담하게 바라보고 사는 것이 신기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경계가 없이 당연하듯 살고 있는 태도를 가족이나 당사자들이 모두 지니고 있었다.

백세인들은 자신이 충분히 살았음을 받아들이고 적절하게 떠나야 함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특히 담양군에서 만난 백세 할머니는 며느리 구박도 하고 동네 일에 참견도 하고 있기에 으레 생에 대한 집착이 클 것으로 생각해 할머니와의 인터뷰를 마치면서 더 오래 건강하게 사시라고 인사를 하자 할머니의 답은 퉁명스러웠다. "그런 소리 마소. 저승사자가 나를 잊어버린 모양이네. 제발 저승사자에게 나 데려가라고 부탁 좀 전해주게"하며 오히려 차라리 어서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부탁하는 것이었다.

전통사회에서 최고의 복인 오복(五福) 중에서 행복의 첫째는 장수이고 최악의 불행인 육극(六極)에서 불행의 첫째는 단명임을 강조해왔다. 그래서 모든 일상생활 도구도 수(壽)와 복(福)자 문양으로 장식했고, 십장생 문양을 걸어 두면서 장수를 기원했다.
장수는 사람들의 기본 속성이고 당연한 바람이기 때문에 더 오래 사는 것에 대한 집념이 클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오래 살아온 백세인들은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하게 기다리면서 능동적으로 대비하고 있었다.
들어가서 쉴 관과 입고 갈 수의와 노잣돈까지 준비한 백세인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아무런 부담도 지니지 않고 망설임 없이 홀연히 건너갈 수 있는 달관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박상철 전남대 의대 연구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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