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파킨슨병 환자인 80대 남성이 자신을 간병하던 70대 아내에게 말했다. "미안하다"고. 아내는 간병 후유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후 40대 아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너의 아버지 간병을 맡겨 미안하다"는 이유로. 2025년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둔 한국에서 '가족간병의 굴레'는 과장이 아닌 현실이다. <뉴스1>은 간병가족을 직접 만나 복지 사각지대 실태를 점검했고 이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함께 모색했다.
(서울=뉴스1) 원태성 유민주 기자 =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고재익씨(37·가명)는 지난 5년간 술을 단 한번도 마신 적이 없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회식조차 예외다. 5년 전 어머니가 치매 판정을 받으면서 개인의 삶은 사라졌다.
일이 끝나면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요양 보호사와 간병 업무를 교대해야 했다. 지난 5년간 '강제 효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간병을 극진히 하면 치매가 호전될 것'이란 말은 희망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는 아들인 자신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횟수가 늘어갔다. 이제는 대화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다.
일을 병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장기간 독박 간병에 지친 고씨는 "단 며칠만이라도 현실에서 벗어나 내 삶을 살고 싶다"고 토로했다.
◇"월 간병비로만 320만원…5년간 사회생활도 못해"
고씨는 세후 받는 월급 약 400만원에서 어머니 병원비 등 간병 비용만 월 320만원을 지불한다. 고씨가 독박 간병을 자처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만의 시간을 위해서는 사설 간병인을 쓸 수밖에 없지만 그럴 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
현재 정부는 신체적·정신적 기능장애를 기준으로 수발 비용을 지원하는 노인장기요양 보험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장기요양신청 대상은 65세 이상의 노인 또는 65세 미만의 자로서 치매·뇌혈관성질환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노인성 질병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장기요양 보험제도의 혜택을 받더라도 짧게는 4시간, 길게는 8시간만 전담 간병인을 쓸 수 있다. 남은 시간은 가족이 감당해야 한다.
◇가족 간병은 의무?…간병인 쉴 권리·인권보호 없는 복지 사각지대
한국은 2025년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둔 상황이지만 해외 선진국들과 달리 가족 간병의 고통을 국가와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가족간병을 경제활동으로 인정해주는 해외 선진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가족에게 간병은 의무일 뿐이다.
게다가 한국 사회 내 관심은 간병인의 복지가 아닌 노인장기요양보험 등 노인에 대한 복지시스템으로 설계돼 있다. 간병인의 권리보장이나 인권 문제는 사실상 복지사각지대인 셈이다.
'가족간병의 굴레'에 빠진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직장을 그만둘 수도 없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실시한 '간병에 대한 국민인식조사'에서 간병인을 쓴 경험이 있는 간병 경험자의 40.8%가 하루 11만원 이상의 간병비를 지급했다고 응답했다. 특히 중증질환자의 경우 한 달 간병비만 400만을 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간병비에 대해 부담스럽다'고 응답한 비율도 96%나 됐다. 그중 59.5%가 "(간병비가) 너무 비싸서 매우 부담스럽다"고 응답했다.
간병비 부담과 생계유지를 위해 간병인이 직장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에서 이들은 쉴 권리 또한 보장되지 않는다.
그나마 치매환자의 경우 연간 6일간 시설에 맡길 수 있는 치매휴가지원제도가 있다. 하지만 홍보와 시설부족으로 이용이 저조하다. 방문요양 서비스를 신청하면 하루 3시간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 제도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다른 중증환자의 간병을 맡는 경우 이런 지원조차 전무하다.
◇정부, 간호·간병통합서비스 확대 등 대안 제시…"인식 개선부터 선행돼야"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대선 당시 요양병원 간병비 건강보험 급여화를 추진하고 병이 급속하게 진행되는 급성기 환자의 경우 간호‧간병통합서비스를 확대해 지원을 늘리겠다고 공약했다.
2014년부터 시행 중인 간호간병 통합 서비스는 병원 내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지원인력 등이 24시간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도다. 통합병동을 이용하면 간병비는 하루 1만5000원~2만원 선으로 떨어진다.
그렇다보니 해당 서비스를 이용한 사람들의 만족도는 개인 간병인을 고용했을 때(65.2%)보다 높은 편(87.2%)이다. 병원 입장에서도 일반병동보다 2배에 가까운 수가를 받아 수익이 높기 때문에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그러나 현재 통합병동은 '공급'이 부족한 상태다.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에서 간호간병 통합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으나 지난해 말 기준 656개 의료기관(7만363병상)만이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지역 중소병원은 의사와 마찬가지로 간호인력을 구하기가 어려워 통합병동 참여율이 저조하다.
그나마 사업에 참여한 의료기관들도 '경증 환자'만을 대상으로 간호간병 통합 서비스를 운용하는 경우가 많아 급성기나 중증환자들을 위한 병동 공급이 시급한 상황이다. 병동 공급을 늘리기 위해서는 간호사 수급 문제 등 예산 확보가 선행해야 한다.
'간병비 급여화' 제도 또한 아직 시작 단계에 머물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2월6일에야 전국 요양병원을 대상으로 간병 실태와 급여화 수요 파악에 나섰다. 결과가 나오는 데만 8~10개월이 소요될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대안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간병을 개인이 아닌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 확산이 선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아직까지 간병이 가족의 부담으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정책적인 대응의 효과를 보기 어렵다"며 "간병의 사회화, 즉 간병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부터 자리 잡아야 정책이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간병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 때문에 현재 관련 보험들이 민간에 맡겨지고 있는 것"이라며 "간병 문제를 공공 시스템에 포함하기 위해서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만이 아닌 논의를 통해 이 문제를 공론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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