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다부동전투 승리 이끈 백선엽 장군,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정전 70주년, 영웅을 기억하다]

예병정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06.20 18:35

수정 2023.06.21 07:19

백선엽장군기념사업회 
한규성 대표에게 듣는다
‘낙동강방어선’ 지킨 6·25 가장 치열한 전투
병력·화력 열세에도 북한군 총공세 막아내
합참의장 당시 아이젠하워 美 대통령 찾아가
한미상호방위조약 제의… 한미동맹 기초 마련
정부 차원서 ‘5성 장군’ 추대되도록 노력할 것
‘백선엽 어워드’ 만들어 백 장군 정신 널리 전파
한규성 백선엽장군기념사업회 대표가 한국전쟁 당시 백선엽 장군의 공로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백선엽 장군에 대해 "한국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를 통해 북한의 공세를 결정적으로 막아냈다"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학생군사교육단(ROTC) 도입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사진=서동일 기자
한규성 백선엽장군기념사업회 대표가 한국전쟁 당시 백선엽 장군의 공로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백선엽 장군에 대해 "한국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를 통해 북한의 공세를 결정적으로 막아냈다"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학생군사교육단(ROTC) 도입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사진=서동일 기자
인구 350명(지난해 기준)이 사는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당시 지명 다부동). 이런 작은 동네를 두고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8월 3일부터 29일까지 '다부동 전투'가 벌어졌다. '동양의 베르됭 전투'로 불린다.
베르됭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 프랑스와 독일 간에 벌어진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소모전이다. 다부동에서도 베르됭 전투에 버금갈 정도의 참혹한 전투가 있었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불법 남침으로 시작됐다. 초기 국군은 힘을 쓰지 못하고 낙동강까지 밀려났다. 더 밀리면 국가가 지도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절박함에 국군과 미군은 낙동강과 경북 동북부 산악지대를 천연장애물로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를 '낙동강방어선'이라고 한다.

낙동강방어선에서는 한국군과 북한군 간 뺏고 뺏기는 점령전이 수차례 이루어졌다. 한국전쟁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로 대구 다부동 전투가 꼽힌다. 낙동강방어선 가운데 대구 북방 22㎞에 위치한 다부동은 대구 방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였다. 만일 다부동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지형상 아군은 10㎞ 남쪽으로의 철수가 불가피하고 대구가 적 지상화포의 사정권 내에 들어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게 돼 있었다. 따라서 북한군은 다부동 일대에 증강된 3개 사단을 투입, 약 2만1500명의 병력과 전차 약 20대 및 각종 화기 약 670문으로 필사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보충받은 학도병 500여명을 포함, 7600여명의 병력과 172문의 화포 등이 전부로 열세였다. 하지만 결과는 드러난 전력과 다르게 나왔다. 다부동 전투 승전의 주인공은 '국군'이었다. 북한군은 25일간 거의 밤낮없이 총공세를 펼쳤지만 다부동을 넘지 못했다. 그리고 당시 국군을 이끌고 승리를 만들어 낸 인물은 백선엽 장군(당시 준장)이었다.

군복무 당시의 백선엽 장군. 뉴시스
군복무 당시의 백선엽 장군. 뉴시스
■"다부동 전투 승리, 구국의 영웅"

서울 종로구 모처에서 만난 한규성 백선엽장군기념사업회 공동대표는 다부동 전투에 대해 "마지막 보루였다. 거기서 후퇴했다면 대한민국은 망하는 상황이었다"며 "당시 종군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공포에 질려있던 병사들을 독려하고 살신성인의 마음으로 가장 앞서 (북한군을 향해) 돌격했던 분이 고 백선엽 장군이다. 자신이 후퇴하게 되면 자신을 쏘라고 하니 병사들도 감동해 도망가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고 밝혔다.

한 대표는 "다부동 전투 승리로 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패했더라면 낙동강방어선도 지키지 못했을 것이고 이후 인천상륙작전도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몸을 사리지 않은 백선엽 장군 덕에 우리나라가 한국전쟁을 극복했고 지금과 같은 세계 10위권 강국도 됐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실제 최근 다부동 전투 등 당시 북한군의 공세를 국군과 미군의 연합 작전으로 막아낸 점이 한국전쟁의 전황을 역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연구가 있다. 나아가 한미 간 상호 신뢰도 형성될 수 있었다는 평가다.

한 대표는 백선엽 장군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에는 다부동 전투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다부동 전투 승전을 비롯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학생군사교육단(ROTC) 제도 도입에 역할을 한 점도 주목해야 한다는 것.

특히 한 대표는 "백선엽 장군은 한국전쟁 중인 1953년 5월 합동참모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을 만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제의했고 그것이 한미동맹의 기초가 됐다"며 "올해 한미동맹 70주년이 되는 해다.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든든한 안보가 마련됐기에 우리나라가 세계 강국이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백선엽 장군 생전에 주한미군사령관이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인사한 사례가 있다"며 "해리 해리스 전 주한미국대사도 백선엽 장군에 대해 세계적인 영웅이라고 이야기한 바가 있다"고 언급했다.

지난 2020년 7월 15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고 백선엽 장군 안장식'.뉴시스
지난 2020년 7월 15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고 백선엽 장군 안장식'.뉴시스
■"5성 장군으로 추대할 것"

백선엽장군기념사업회는 지난 2020년 7월 10일 치러진 백선엽 장군 장례예배를 기점으로 출범하게 됐다.

한 대표는 "(저는) 당시 ROTC 기독장교연합회 회장이었는데 백선엽 장군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해달라는 부탁을 유가족 대표 백남희 여사(백선엽 장군의 장녀)로부터 받아 장례예배를 드린 것을 인연으로 백선엽장군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장례예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그동안 백선엽장군기념사업회는 △백선엽 장군 전기소설 '하늘의 별이 되어' 출간 △백선엽 장군 원수 추대식 △백선엽 장군 서거 2주기 추모예배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백선엽 장군 추모 음악회 등의 활동을 이어왔다.

가장 의미가 깊었던 활동에 대해 한 대표는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백선엽 장군 추모 음악회"라며 "5개 주제로 영상과 음악이 함께 어우러진 국내 최초의 무대였다. 백선엽 장군의 세계적인 영웅성을 널리 알리는 음악회였다. 전국순회공연을 계획 중"이라고 답했다.

백선엽장군기념사업회는 백선엽 장군 원수(5성 장군) 추대와 함께 이른바 '백선엽 어워드'를 만드는 사업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백선엽 장군 원수 추대와 관련 한 대표는 "기념사업회 차원에서는 백선엽 장군 원수 추대식을 열었지만 민간 차원에서 이뤄진 일이지 정부가 공인한 것은 아니다"라며 "앞으로 정부 차원에서 백선엽 장군을 원수로 추대할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백선엽 장군은) 5성 장군으로 부족함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 '백선엽 어워드'와 관련 한 대표는 "백선엽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백선엽 장군의 정신을 전 세계에 보급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올해 첫번째 시상식을 열 계획"이라며 "봉사하고 희생하는 '사람 사랑'의 정신이 바로 백선엽 정신이다. 이런 취지에 맞는 사람을 찾아 상을 주고 싶다"고 전했다.

아울러 백선엽장군기념사업회는 올해 서거 3주기 추모행사도 진행하겠다는 입장이다. 한 대표는 "군에서 백선엽 장군 추모 행사를 주관하겠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군에서 주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기념사업회가 장례예배부터 맡아왔던 일인 만큼 상주의 입장에서 추모행사를 주관하는 것이 맞다"며 "민간인 기념사업회가 주도하고 군이 돕는 방식으로 함께 행사를 꾸려갔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한 대표는 "SNS를 보면 백선엽 장군을 폄훼하는 글이 있다. 하지만 과가 30%고 공이 70%라면 나라를 위해 과를 잠재우고 공을 앞세워야 한다"며 "더구나 백선엽 장군 관련 과로 간주하는 내용은 모두 의도적이다.
백선엽 장군을 영웅으로 모셨으면 한다"고 했다.

coddy@fnnews.com 예병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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