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나라 지키다 얻은 상처… 트라우마와 싸우는 전우에 힘이 되어주고 싶다" [정전 70주년]

김동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06.25 18:40

수정 2023.06.25 20:57

끝나지 않은 전쟁
연평도 포격·유실지뢰 폭발 아픔 딛고 상담 뛰어든 부상 군인들
서울 부상제대군인 상담센터 이주은 운영실장·이한 주임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야 하는 두려움 커
대부분 혼자서 그날의 기억 버티며 살아
부상장병에 정당한 보상·지원 손길 필요
25일 서울 시청에서 만난 이주은 청년부상제대군인 상담센터 운영실장(왼쪽)과 이한 주임이 군 복무 시 겪은 부상과 트라우마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진=김범석 기자
25일 서울 시청에서 만난 이주은 청년부상제대군인 상담센터 운영실장(왼쪽)과 이한 주임이 군 복무 시 겪은 부상과 트라우마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진=김범석 기자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 청년부상제대군인 상담센터엔 군 복무 시절 부상이나 트라우마를 겪은 예비역들이 근무 중이다. 전시에 준하는 사태로 부상을 입었거나 유실지뢰 피해를 입는 등 트라우마를 간직한 군인들이다. 군 복무 중 심한 부상을 입을 경우 어떤 절차를 거쳐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타인의 도움이 없으면 힘들다고 한다. 파이낸셜뉴스는 25일 상담센터의 이주은 운영실장과 이한 주임을 만나 부상장병의 열악한 현실에 대해 얘기를 들어봤다.


상담센터의 직장 동료인 이주은 운영실장(31)은 해병대 중위로 복무하던 2019년 8월 경기 김포 한강 하구에서 갈대 제거작업 중 지뢰가 폭발해 왼발을 잃었다. 지뢰 폭발로 몸에서 떨어져 나간 발을 보았을 때 들었던 감정은 막막함이었다. 앞으로 평생을 장애인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

상담센터는 청년 부상제대 군인을 대상으로 법률지원과 심리·재활 프로그램, 취업연계 등의 행정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같은 프로그램에는 이주은씨의 경험이 녹아 있다고 한다. 부당 당시 해병 측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부상장병에 대한 지원 인프라는 열악했다고 한다. 상시 전시상황도 아니었기에 이주은씨가 주변에 수소문하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이주은씨는 "사고 직후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보상받으려면 어떠한 행정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며 "군 생활을 하면서 제일 궁금했던 것은 나와 같이 복무 중에 부상을 당한 군인에게 국가는 어떠한 보상을 해주는 것인가였다"고 말했다.

전역과 함께 이주은씨는 서울시와 함께 상담센터를 설립해 부상제대군인들을 지원하고 있다. 자신이 겪었던 어려움을 다른 부상제대 군인들이 겪지 않게 하기 위해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었다.

이주은씨는 "우리 사회 어딘가엔 국가를 위해 헌신해 얻은 상처와 고통을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혼자 이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며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한씨(33)는 주변 소리에 민감하다. 스테인리스 집기류가 바닥에 떨어지는 '쿵' 하는 소리에 온몸을 흠칫한다. 고깃집에서 연탄불이 '타탁타닥' 하는 소리에도 온몸이 욱신거린다고 한다. 길을 걷다 비행기 소리를 들으면 몸을 움츠리게 된다. 세월이 흘러 강산이 바뀌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34분 인천 연평도 해병대 부대. 당시 일병이었던 이한씨는 훈련 중에 동료 병사들과 함께 바닥에 누워 쉬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검은색 물체가 해를 가렸다. 북한에서 쏘아 올린 포탄이었다. '쾅' 소리와 함께 이명이 느껴졌고 눈을 떠보니 몸이 공중에 떠 있었다. 왼쪽 다리를 잃은 맞선임, 팔 한쪽이 날아간 선임이 눈에 들어왔다. '연평도 포격전'의 기억이다. 양쪽 광대뼈와 무릎, 사타구니가 욱신거렸다. 포탄의 파편이 박힌 탓이다. 환부는 아프기보단 뜨거웠다.

살고 싶었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포탄 탓에 '쿵. 쿵. 쿵' 흔들리는 지면 사이를 이한씨는 포복했다. 겨우 도랑에 몸을 숨겼다. 그곳에는 명치에 파편이 박힌 후임이 누워 있었다. 이한씨는 심폐소생술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지만, 곧 단념했다. 계속해서 날아드는 파편에 몸을 세울 수가 없었다. 숨이 멎어가는 후임에게 옆에서 "살 수 있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1차 폭격이 멈췄다. 이한씨가 도착한 의무실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피로 흥건해진 바닥은 군화 바닥과 만나 '철벅철벅' 하는 소리를 냈다.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달궈진 핀셋으로 생살을 찢은 후에야 이한씨의 사타구니에서 포탄 조각을 빼낼 수 있었다.

이한씨는 2012년 2월, 만기 전역하며 자취를 시작했다. 매일 밤 불안감이 밀려왔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이한씨와 동거하며 불안함을 달래주었다. 하지만 나이가 서른살에 가까워지니 결혼 등의 이유로 친구들은 더 이상 이한씨 곁에 있을 수 없게 됐다. 이한씨는 다시 혼자가 됐고, 그날의 기억은 더욱 선명해졌다. 불안과 공포는 대인기피증으로 이어졌다. 최소한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선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했지만, 이마저도 힘들게 됐다. 2년 전부터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심리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한다. 다행히 정신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고, 경제활동도 재개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한씨의 의지에 의해 이뤄졌다. 사회도 국가도 그 어느 누구도 이한씨에게 도움의 손길을 먼저 내밀지 않았다.


이한씨는 "지난 10년간 혼자서 그날의 기억을 버텨온 것이 가장 후회된다"며 "조금이라도 일찍 병원을 찾아 도움을 요청했더라면, 누군가와 이 같은 아픔을 공유했더라면 건강한 청춘 시절을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kyu0705@fnnews.com 김동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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