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업과 옛 신문광고

[기업과 옛 신문광고] 입속의 싸한 맛, 고려은단

손성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09.07 18:21

수정 2023.09.07 18:21

[기업과 옛 신문광고] 입속의 싸한 맛, 고려은단
수십년 전만 해도 은색으로 된 하얀 알갱이를 중년 남성들이 입에 털어 넣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하얀 알갱이는 싸한 맛으로 텁텁한 입을 상쾌하게 해주는 '은단(銀丹)'이다. 은단의 뿌리는 일본에서 지금도 판매되는 '인단(仁丹)'에서 찾을 수 있다. 모리시타 히로시라는 일본인이 1895년 대만에 군인으로 출병했다가 현지인들이 복용하는 것을 보고 감초, 계피, 생강 등 13가지 약재로 제조한 생약이라고 한다. 1907년 우리 땅에도 들어왔다. 모리시타 인단은 지금도 인터넷을 통해 판매되고 있고, 해외직구로 쉽게 구매할 수 있다.
나폴레옹 모자와 견장이 붙은 대례복을 입은 남성을 그린 인단의 상표는 100여년 전 창업 당시 그대로다. 상표 속 남성은 만주군 총사령관이나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을 모델로 삼았다고 하나 사실은 일본이라는 상징 체계의 정점, 즉 천황을 연상시킨다고 한다. 이를 일본 제국주의의 위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어질 인(仁), 붉은 단(丹)으로 이름을 지은 데는 이유가 있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첫째인 仁을 사용한 것은 처음부터 중국 시장을 겨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단 알갱이의 색깔은 원래 붉은색이었는데 나중에 은색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창업주 조규철 회장이 경기도 개성에서 인단과 비슷한 맛과 형태를 지닌 고려은단을 개발한 것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이다. 감초, 박하, 계피, 정향 등의 성분을 섞어 제조했다. 고려은단은 6·25 때 부산으로 회사를 옮겼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비슷한 제품을 팔던 회사들이 우후죽순 생겼지만 고려은단만 남았다. 은단은 주로 남성들이 구향(口香)제나 구취제거제로 애용했다. 남자들은 주머니에 하나쯤은 넣고 다녔다. 광고에는 "남자 나이 40이라도 젊은 여자에겐 잘 보이고 싶어"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경향신문 1992년 7월 5일자·사진). 금연보조제나 담배 냄새를 없애는 용도로 쓰기도 했고 중고생들이 은단을 갖고 다니면 흡연자로 의심을 받기도 했다. 남성의 필수품으로 여겨지던 은단도 입냄새를 없애주는 제품들이 나오면서 판매량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창업주의 손자인 조영조 사장이 경영을 맡고 있다. 은단 판매가 줄면서 사업의 방향도 바꾸었다. 기호와 유행의 변화에 대응을 잘한 기업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개그맨 유재석을 광고모델로 내세우고 비타민과 건강기능식품을 고려은단의 주력상품으로 키우고 있다. 특히 비타민C가 많이 팔리고 밀크시슬, 오메가3, 프로바이오틱스, 콜라겐 등도 판매한다. 그래도 장노년층 소비자의 은단에 대한 향수는 사그라들지 않고 여전하다.
현재도 꾸준히 고려은단을 찾는 이들이 있어 한 달 판매량이 20만케이스에 이른다고 한다. 고려은단은 대표적인 개신교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경부고속도로 등의 광고판이나 건물, 운송 차량에서 'JESUS LOVES YOU 고려은단'이라는 글씨를 발견할 수 있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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