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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와 나의 사적인 이야기: 4화 [이환주의 아트살롱]

이환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09.30 14:53

수정 2023.09.30 14:53

2022년 크리스마스인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코엑스 내 별마당 도서관 /사진=뉴시스
2022년 크리스마스인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코엑스 내 별마당 도서관 /사진=뉴시스

"저기, 크리스마스 이브에 별 일이 없다면 우리 학교 정문에서 한 번 만나지 않을래요?"

교지에 '고양이를 좋아하세요?'란 제목의 단편소설을 쓰고, 그 글을 보고 내게 이메일을 보내 온 사람과 나는 몇 주간 이메일을 주고 받은 뒤에 이렇게 물었다. 상대 역시 내가 쓴 글에 대해 인간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내 인생 첫 데이트 신청은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한동안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번호를 교환하고, 종종 문자를 하는 사이까지 발전했다. 2004년 당시에 나는 대학에 입학하며 처음 핸드폰을 갖게 됐다. 당시에 내가 쓰던 폰은 '팬택앤큐리텔'이란 회사의 플립폰이었다. 문자에 서툴기도 했고,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며 문자를 하는 것도 익숙치 않아서 문자 하나하나에 꽤나 신경을 써서 보냈던 것 같다.


문자를 주고 받으며 시간이 흘렀고 약속 날짜인 크리스마스 이브는 금방 찾아왔다. 정확하진 않지만 내 기억에 우리는 오후 1시쯤 학교의 정문에서 보기로 약속을 잡았다.

남중, 남고를 나와 여자와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스무살의 첫 데이트 약속은 그 어느때보다 나를 고양된 상태로 만들었다. 여유있게 준비를 하고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약속 시간보다 2시간 빠른 오전 11시 쯤에 학교 정문에 도착해 버렸다.

일찍 도착한 김에 그날의 모든 동선과 일정을 미리 계획해 두기로 했다. 점심을 먹을 파스타집을 미리 정해두고, 그 다음에 갈 카페도 미리 점찍어 뒀다. 그리고 처음 만남이 어색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카페에서 이야기가 막히면 서로 크리스마스 카드를 한 장씩 써서 나누는 것도 좋을 듯 싶었다. 상대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고,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카드를 나눠 갖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정문 근처에 있는 알파문고에 들려서 적당한 크리스마스 카드 2장과 검은색 볼펜 2자루를 샀다. 작은 봉지에 카드와 볼펜을 넣고 나오는데 문득 '내 손에 카드와 볼펜이 들려 있으면 상대가 바로 의도를 알아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알파문고의 아르바이트 생에게 내가 샀던 봉지를 건네주면서 "이따가 찾으러 올테니 잠시 동안 보관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화장실에 가는척 하고 카드와 펜을 다시 찾아올 생각이었다.

이것 저것 하다 보니 시간이 흘렀고 약속 시간 30분 정도 전부터 나는 약속 장소인 정문 앞에서 오늘 만나기로 한 상대를 기다렸다.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여자라는 사실 말고는 아는 것이 없었다. 정문에서 정문으로 지나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여자 중에 실루엣이 괜찮은 사람이 보이면 혹시나 상대일까 하는 마음에 순간적으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상황이 여러번 반복됐다. 치과 치료를 받기 위해 침대에 덩그러니 누워서 의사 선생님을 기다리는 것 같은 떨림이 들기도 하고, 초등학교 시절 제비 뽑기로 옆에 앉을 이성 짝을 뽑는 것을 기다리는 것 같은 묘한 설렘도 있었다.

약속 시간 10분 전에 상대에게 문자가 왔다. 역에서 버스를 타고 약속 시간에 맞춰서 정문에 도착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상대에게 옷차림을 설명하는 문자를 보냈다. 당시에 나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풀색 더플 코트(일명 떡볶이 코트)를 입고 있었다. 상대는 보라색인가의 목도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마침내 약속 시간이 다 됐고 정문 앞으로 버스 한 대가 정차했다. 출입구의 앞문과 뒷문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버스를 내리는 한 명 한 명이 슬로우모션으로 보였다. 한 명, 한 명 보라색 목도리를 찾아봤지만 버스의 승객이 모두 내릴 때까지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정문 / 사진=연합뉴스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정문 / 사진=연합뉴스

당황해서 문자를 보내봤지만 상대 역시 지금 정문에 내렸으며 나를 찾고 있다고 했다. 나는 상대에게 '전화를 하겠다'는 문자를 보내고 상대의 번호로 처음 전화를 걸었다. 상대의 목소리를 처음 듣고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혹시 지금 서울 캠퍼스 정문이 아닌가요?"

공교롭게도 상대는 같은 이름을 가진 수원 캠퍼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대는 오늘 나와 만나기 위해 작은 선물 같은 것을 준비했으며, 괜찮으면 자기가 지금 서울로 올라 올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의 나는 이미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버려서 상대의 그 말에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그러자고 할 수 없었다. 나는 상대에게 다음에 다시 약속을 잡고 만나자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2004년 당시에 경희대학교에는 서울 캠퍼스와 수원 캠퍼스 모두에 영어학과가 있었다. 당시에 두 과를 통폐합 해야 한다는 내부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하필 교지에는 내 소속 과와 이메일만 나와 있었기 때문에 상대 입장에서는 자신이 있던 수원 캠퍼스의 영어학과라고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과거 영화 중에 유지태와 김하늘이 주연했던 '동감'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그 영화에서 두 인물들은 무선 통신 같은 걸로 서로 통화를 하지만 살고 있는 시대가 달랐다. 서로 만나기로 했지만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크리스 마스 이브의 불발 이후로 우리는 한동안 문자를 더 주고 받았다. 그리고 해가 바뀐 뒤 다음해 1월 나는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다음해 1월 어느 날 그녀가 다니는 경희대학교 수원캠퍼스에서 그녀를 만나게 된다.

2002년 개봉한 영화 '동감' 포스터
2002년 개봉한 영화 '동감' 포스터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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