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피플일반

"시련 없는 축복 있나, 산다는 건 현실의 계단을 오르는 일" [fn이 만난 사람]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10.30 18:14

수정 2023.10.31 16:48

묵상집 '미치고 흐느끼고 견디고' 펴낸 시인 신달자
묵상집을 손에 든 신달자 시인이 지난 25일 서울역 부근 공원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서동일 기자
묵상집을 손에 든 신달자 시인이 지난 25일 서울역 부근 공원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서동일 기자
팔순 시인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 "하도 강의를 많이 해서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이는 신달자 시인이다. 스물한 살에 작가의 길을 걸어 내년이면 등단 60년을 맞는다. 80년 생을 돌아보면 시련이 일상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생을 들어 올린 쪽은 시인이다. 젊은 날 쓰러진 남편을 홀로 돌보며 딸 셋을 키운 시인은 역경의 시간을 곱씹어 시와 산문을 지었다. 어느새 든든한 문학의 집, 생각지 못한 평화가 시인의 것이 됐다.

굴욕과 상처가 없었던 때가 없고, 그때마다 분연히 일어섰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돌아보면 나는 뜨겁고 넘치고 과해서 운명으로부터 귀싸대기를 얻어맞으며 살았지만 열정은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시인의 고백에 어느 정도 답이 있을 것이다. 그는 팔순을 맞아 올해 작심한 듯 연거푸 책을 내고 있다. 쇠한 육신을 위로한 시집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을 펴낸 데 이어 최근 묵상집, 시선집을 출간했다. 묵상집은 지난 시간을 뒤돌아보는 기도문 같은 책이다. 제목이 '미치고 흐느끼고 견디고'다.

시인에 따르면 지금은 모든 게 아슴하고 피가 얼 듯한 고독도 없고 눈알이 터질 듯한 슬픔도 없다. 온몸을 쥐어짜면서 통곡하는 울음도 없다. 그래서 아쉬운가? 그렇지 않다. "편안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계단을 오르는 일이다. 계단은 힘들고 고달프다. 노동이고 현실이다. 그러나 시련 없는 축복이 어디에 있겠나. 계단을 오르는 일, 그것을 받아들이면 된다."

시인을 지난 25일 서울역 인근 한 카페에서 만났다. 사고로, 수술로 병원 신세를 졌던 몸은 곳곳에 통증이 남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꼿꼿했다. "젊은 날엔 팔십까지 살 줄 정말 몰랐다"며 웃는 시인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음을 안다. 더불어 행복했다. 그래서 감사하다"고 했다.

인터뷰 = 최진숙 논설위원

―'미치고 흐느끼고 견디고'라는 제목이 비장하다.

▲내 인생을 세 마디로 줄인다면 저 말밖에 없다. 젊었을 때 미치지 않으면 어디라도 갈 수가 없었다. 미치는 것 또한 살아내는 방법이었다. 삶의 중반엔 흐느낄 일이 너무 많았다. 밥을 먹을 때도, 강의를 할 때도,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 때도. 그다음이 견디는 일이다. 삶의 숙제였다. 이 세 가지가 없었다면 이 나이까지 살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에 감사한다. 이 한마디를 전하기 위해 책을 썼다.

―팔순 나이가 주는 편안함이 글에서 느껴진다.

▲사실 지금도 불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에선 전쟁도 있지 않은가. 걱정도 되고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이 나이에도 쓸쓸하고 외롭고 슬프다. 혼자 울기도 한다. 하지만 이 나이는 그 슬픔들을 마음으로 끌어들여 다독이는 친절함을 안다. 삶에 있어서 지금은 인생을 받아들이게 됐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그전에는 왜 나한테 이래요, 대들고 했다면 이제는 알겠습니다, 한다. 지나간 시간보다 남은 시간이 적기 때문에 수용력이 더 생긴 게 아닌가 싶다. 지금 나이가 좋다.

―외로움과 매일 싸운다고도 했는데.

▲살아있는 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외로움이다. 이 세상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이 세상 나만 겪는 고통도 없다. 외로움은 내게 소금과 같다. 약간은 간을 맞추는 데 좋지만 조금만 넘치면 요리를 망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싸운다. 용용 죽겠지 하고 외로움이 화를 내게 하면서 달아나게 하려고 애를 쓴다. 사실 어른이 가장 잘 버텨야 하는 것이 외로움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 외로움을 어떤 방식으로 물리치고 이기는 과정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한때 우울증 약을 드셨다는 고백은 사실 놀라웠다.

▲남편은 투병 24년에 50번 넘게 입원했다. 2000년 마지막 떠나기 전 3년 동안 주변을 정말 힘들게 했다. 그때 우울증이 왔던 것 같다. 당시 한강변에 살았는데 의사가 집을 옮기라고 해서 대모산이 있는 수서로 갔다. 2001년이다. 새벽산을 다녔는데 가기 싫은 날도 당연히 있었다. 매일 확인전화를 하는 의사에게 누워서 가고 있다고 거짓말한 적도 있다. 하지만 자연의 힘은 위대했다. 1년2개월 만에 극복했다. 우울증은 누구에게나 조금씩 있는 질병이라고 한다. 내 경험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됐으면 한다.

―고향과 어머니가 80년 삶과 글의 뿌리이지 않을까.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거의 전부라 할 만큼 나의 생은 우둘투둘했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웃음이 번지는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고향 집 마당이 그 첫 번째다. 여름날 마당에 정갈하게 짠 큰 평상이 있다. 그 위에 아버지, 어머니, 언니들 동생이 누워 있다. 수박을 나눠서 먹고 하늘의 별을 바라본다. 옛날 가족 생각하면 진저리나지만 그날, 그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인생은 그런 거 아니겠나. 어머니는 내게 죽지 않을 사람으로 보였다. 그만큼 강력한 존재였다. 죽을 때까지 공부해라, 돈도 벌어라, 여자로서 행복하라. 1959년 9월 첫날 첫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전학 가는 여고 1학년 내게 하셨던 당부다. 딸은 자신과 다르게 살길 그토록 원하셨다.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가 남긴 말의 유산이 귀하게 느껴진다.

▲내 30대 인생이 누더기처럼 펄럭이고 있을 때 어머니가 병실에 있던 내게 전화를 하셨다. "그래도, 그래도 니는 될 끼다." 딱 그 한마디였다. 전화는 끊어졌지만 주저앉아 통곡하는 모습이 아른거렸다. 어머니는 내게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절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그래도, 된다'는 말은 내 생의 지팡이가 됐다. 생의 가파른 언덕을 나는 그 지팡이를 짚고 올랐다.

―그러고 보면 1992년은 생애 가장 눈부신 날들이었다.

▲뭐든 잘 풀리는 해였다. 수필집 '백치애인'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영화가 됐다. 첫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는 서로 영화로 만들겠다며 경쟁이 어마어마했다. 수필집 '그대에게 줄 말은 연습이 필요하다'도 날개를 단 듯 팔렸다. 그러다 보니 내 이름이 붙은 책들에 해적판까지 생겨 곤욕을 치렀다. 주머니는 제법 두둑해졌다. 박사학위도 그해 받았다. 검은색 표지 논문집을 잡고 울었다. 그러고 한달도 안 돼 피어선대학(지금의 평택대학)에서 교수 제안이 왔다. 내게는 거룩한 성취였다. 무엇보다 결혼한 딸이 그해 말 아들을 낳았다. 불행은 절대 혼자 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해였다.

―생은 냅다 던져버리든지, 들어올리든지 둘 중 하나라고 했다. 결국 후자가 됐는데 무엇이 가장 큰 힘이었나.

▲6인실 병실 화장실에서도 글을 썼다. 그 세월을 견디게 해준 힘은 아무리 생각해도 가족이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옆에 없었다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걸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린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한다, 이런 말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가족을 지켜야 하고 살아남아서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사회적 욕망이 컸다고 봐야 한다. 남편이 오래 아프면서 별별 일을 다 경험했다. 그 굴욕스러운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이걸 글로 써야지 하는 강렬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돌아보면 굴욕보다 주목의 시간이 더 많지 않았나.

▲인생 자체가 원래 굴욕이다. 살아가는 바탕에 굴욕이 있다. 그걸 참을 줄 모르면 자기 꿈을 이루지 못한다. 굴욕을 견뎌내야 빛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 빛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다. 나의 경우 아이들이 없었다면 될 대로 돼라 살았을 것이다. 엄마까지 제대로 생활을 꾸리지 못하면 딸들은 어떻게 되나. 그 생각에 굴욕을 참기로 했다. 먹는 밥보다 굴욕의 양이 많아질 때쯤 앞이 보이기 시작했던 기억이 있다. 대학원 갈 때 영어시험에 세번이나 떨어졌다. 그것도 굴욕이었다. 그런데 포기 안하고 했다.

―박목월 시인의 가르침을 받았고, 등단 60주년을 앞두고 있다. 문학적 성취를 돌아보면 감회가 어떤가.

▲모든 걸 말해야 하는 것이 문학이다. 실패도 시련도 그리고 따귀를 맞은 일도, 모든 것이 문학에 들어간다. 좋은 것만 글로 쓰는 건 문학이 아니다. 내 문학을 돌아보면 내가 정직하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나, 엄격해진다. 시는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국가 명령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했나 묻게 된다. 후회가 있을 수 있다. 열심히 하긴 했는데 역량이 부족했던 게 아닌가 생각도 든다.

―남은 시간 더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시집 하나쯤 더 쓸 수 있을까. 예전엔 계획을 잘 짰는데 이제 답을 확실히 못한다. 남은 시간에 대해선 알 수 없다. 가족들과 밥이라도 한번 더 먹고, 손주들에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더 들려주고 싶다. 앞으로 살아내야 하는 시간은 어떨까 궁금하다. 그저 하루하루와 잘 사귀고 싶다. 시간과 잘 지내고 싶다.

■ 신달자 시인은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동대학원 졸업. 1964년 '여상' 여류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등단한 뒤 1972년 박목월 시인 추천으로 재등단했다.
평택대 국문과 교수, 명지전문대 문창과 교수, 한국시인협회장 등을 지냈다. 은관문화훈장,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등 화려한 문학상 수상 경력이 있다.
지금은 지난달 재창간된 문예지 '유심'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