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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용 노동자상 모델은 일본인' 표현, 명예훼손일까[서초카페]

조윤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11.30 13:21

수정 2023.11.30 14:36

서울 용산구 용산역광장에 설치된 강제징용노동자상. ⓒ News1 송원영 기자 /사진=뉴스1
서울 용산구 용산역광장에 설치된 강제징용노동자상. ⓒ News1 송원영 기자 /사진=뉴스1

[파이낸셜뉴스] 일본 교토와 서울, 부산 등에 세워진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조각한 조각가에게 "조각상 모델은 일본인"이라고 표현했다면 이는 과연 명예훼손죄에 해당할까.

대법원 3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30일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제작한 조각가 부부가 A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의정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조각가 부부는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추진위원회 의뢰를 받아 일제시대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제작해 2016년 8월부터 2019년 8월까지 일본 교토 단바 지역에 있는 단바망간기념관을 비롯해 서울, 대전, 부산 등지에 순차 설치했다. 이 부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의 제작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A씨는 이 노동자상이 '실제로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을 모델로 한 것', '교과서에서도 빠진, 잘못된 사진 속 일본인을 모델로 한 동상건립이야말로 친일을 자행하겠다는 것' 등 내용의 글을 SNS에 게시했다.

이에 대해 조각가 부부는 A씨가 허위 사실을 적시해 명예를 훼손했다며 소송을 냈다.

이 사건은 노동자상의 모델이 일본인이라는 발언이 사실 또는 허위사실의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이 될 것인가가 쟁점으로 하급심 판단이 엇갈렸다.


1심은 명예훼손으로 볼 수 없다고 보고 조각가 부부의 청구를 기각했다. 반면 2심은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책임을 일부 인정했다. A씨의 발언이 "원고들을 피해자로 특정할 수 있는 단정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의 적시이자, 그 내용이 사실과 다른 허위에 해당한다"는 취지에서다. 이에 따라 2심은 A씨가 부부에게 각 2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2심은 "원고들의 노동자상 제작 과정을 몰랐음에도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실로 오인될 수 있는 단정적 표현을 사용했고, 그 내용이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볼 사정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A씨 발언들이 사실의 적시가 아니라 의견의 표명, 구체적인 정황 제시가 있는 의혹의 제기로 명예훼손의 불법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볼 여지가 많다고 봤다.

보통 순수한 의견 표명 자체 만으로는 명예훼손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어떠한 표현이 사실의 적시인지 의견의 진술인지는 어휘의 통상적인 의미나 전후 문맥 등 전체적인 흐름, 사회평균인의 지식이나 경험 등을 고려해 그 표현의 진위를 결정하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대법 판례다.

이 사건에서 A씨 발언들은 그 전체적인 맥락 등을 고려하면, 노동자상이 일본 내에서 강제노역을 하다가 구출된 일본인을 모델로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거나 양자 간에 상호 유사성이 있다는 A씨의 비판적 의견 표명으로 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특히 "예술작품이 외부에 공개되는 순간 감상자의 주관적 평가의 영역에 놓여 그에 따른 비평의 대상이 되는데, 비평 자체로 모욕적이고 경멸적인 인신공격에 해당해 타인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등 별도의 불법행위를 구성하는 정도에 이르지 않는다면 섣불리 이를 구체적인 사실의 적시로서 명예훼손의 성립요건을 충족한다고 평가하는 것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판시했다.


이어 "이 사건 노동자상은 공적 공간에 설치되어 일제 강제징용과 관련된 공론을 이끌어낸 조각상이라는 점에서 공공의 이익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노동자상과 유사하다고 지목된 일본인들의 사진은 실제로 상당기간 국내 교과서나 국립역사관 내 설치물에도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로서 소개된 바 있었고, 이후 그 인물들이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순차 교체되거나 삭제되기에 이른 점 등을 볼 때, A씨 발언 등이 설혹 진실한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당시 그 내용이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yjjoe@fnnews.com 조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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