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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의 춤과 함께] 나의 첫사랑과 짝사랑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1.11 18:23

수정 2024.01.24 08:51

불같은 사랑 '줄리엣' 매력
배역에서 헤어나지 못해
들짐승 같은 ‘카르멘’ 고역
김지영 경희대 무용학부 교수
김지영 경희대 무용학부 교수


무용수로서 가장 큰 매력은 발레 작품 속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아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백조의 호수, 지젤, 돈키호테 등 많은 작품을 했는데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중 하나는 몬테카를로 발레단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이다. 장 크리스토프 마요가 안무한 작품으로 새롭고 현대적인 안무와 단순화된 무대장치, 의상, 극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조명 효과, 영화 같은 연출력의 드라마 같은 발레다.

2000년 국립발레단 초연 당시 마요의 줄리엣을 처음 비디오 영상으로 봤을 때는 그 매력을 알 수가 없었다. 170㎝가 넘는 장신의 줄리엣과 작품의 안무, 표현방식은 내가 배운 클래식 발레와는 다른 다소 충격적인 것이었으며 현대적이었다. 하지만 캐릭터를 이해하며 진정한 작품의 매력을 알게 되면서 매일 영상을 보며 줄리엣의 몸짓과 사랑에 빠져 무용수의 춤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발끝이 아닌 일상생활하듯 뒤꿈치를 디디며 걸어보는 동작, 사랑에 빠진 연인 간의 장난, 다툼, 키스 등 이런 감정들을 배우처럼 자연스럽고 진실되게 몸짓과 표정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20대 초반 사랑의 감정 표현이 서투르고 연륜이 적었던 나에겐 '감정을 몸으로 말한다'는 것이 익숙지 않았고 미완성의 줄리엣이었다. 2011년, 2013년 마요의 줄리엣을 다시 만나게 되는데 손끝에서 발끝까지 가득 채운 감정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풀어놔야 한다는 것을 점차 이해하게 되면서 그런 다양한 감정들이 오페라하우스 같은 큰 공연장에서 관객에게 잘 전달될 수 있을까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무대에서 나의 감정을 믿고 진실되게 표현하자 관객들은 줄리엣의 행복·슬픔·절망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음악의 이해도는 물론 그동안 다양한 작품을 통해 쌓은 연륜과 인생경험을 바탕으로 그 누구의 모방도, 계산에 의한 연기도 아닌 줄리엣 자체가 되어 사랑의 감정·설렘·슬픔과 좌절을 솔직하게 몸으로 표현했다. 나의 줄리엣은 불같은 사랑을 하는 솔직하고 자신감 넘치는 나를 투영한 줄리엣이었고, 무대 위에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자유로움에 희열을 느꼈다. 공연을 마치고 일주일 동안 배역에서 헤어나지 못해 매일 꿈까지 꾸었다.

줄리엣이 나에겐 첫사랑 같은 작품이라면 카르멘은 짝사랑같이 힘들게 했던 작품이었다. 40분가량의 단막 작품으로 카르멘에게 빠져 파멸해 가는 호세와 그에 의해 생을 마감하게 되는 카르멘을 통해 사랑이 주는 강렬함, 무모함, 비극을 영화를 보듯 서사적으로 보여준다. 기존 발레에서 볼 수 없던 파격적이고 신선한 시도의 의상, 커트머리 카르멘으로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위해 남자들을 도구로 생각하는 여자다. 캐릭터를 파악할 때 단순히 팜므파탈로 연기하기에는 입체적이지가 않았고 카르멘의 선과 악, 욕망과 열정을 동시에 표현한다는 것이 어려워 영화, 오페라를 보며 아이디어를 얻었다. 하지만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하며 모든 것을 욕망의 도구로만 바라보고 사나운 들짐승 같은 카르멘은 생각보다 더 어려운 캐릭터였고, 직설적이며 날것의 카르멘을 대사 없이 몸과 표정으로 표현하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공연 당일 엄청난 스트레스로 공연을 마치고 펑펑 울었는데 힘든 과정을 마치고 끝났다는 후련함과 아쉬움의 눈물이었던 것 같다.


발레의 정형화된 동작은 공식처럼 흐름을 따르지만 캐릭터의 구현은 감정과 몸의 표정을 춤으로 표현하기 위한 지속된 고민과 도전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며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 작품에 녹아들수록, 춤을 출수록 이해가 되는 것이다. 완벽한 테크닉은 기본이고 무용수 표현력에 따라 작품의 질이 천차만별이 되며, 무용수에게 전적으로 맡겨진 표현의 자유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낯섦과 어설픔이 아닌 신선함과 새로움으로 보여지기 위해 무용수는 자신이 맡은 캐릭터는 물론 작품에 관련된 모든 것을 연구하고 완전히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고, 그것이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다.

김지영 경희대 무용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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