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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광장] 미국의 反동맹 DNA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3.04 18:54

수정 2024.03.04 18:54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미국은 현재 40여개 국가와 공식·비공식적 동맹관계를 맺고 있지만 건국 초기만 하더라도 동맹을 혐오하던 나라였다. 동맹은 오히려 당시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주요 외교정책 수단이었다. 자국에 유리한 '세력균형(balance of power)' 구도를 위해 유럽의 열강은 철저히 이해관계에 따라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합종연횡(合從連橫)'의 동맹정책을 즐겨 사용했다. 세계 최초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립한 미국은 이러한 동맹정책을 타락한 유럽 전제 왕정국가의 저급한 정책 관행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유럽의 세력균형 외교와 동맹정책에 엮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유와 민주의 표상인 미국이 가야 할 길이라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미국 '건국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의 글과 발언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초대 미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이임사에서 "동맹을 피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어야 하는데, 유럽 국가와 동맹으로 엮이게 되면 미국의 평화와 번영도 엉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의 후세 정치인들은 워싱턴의 조언을 충실히 따랐다. 제1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분쟁이 동맹으로 묶여 있던 유럽 전역으로 순식간에 확산해 발발한 참화였다. 전쟁이 터진 후 미국은 3년 동안 방관만 했다. 당시 독일 외무장관 아르투르 치머만이 멕시코와 일본을 동맹에 끌어들여 미국을 공격하자고 제안한 '치머만 전보'가 일반에 공개된 후에야 참전 결정을 내렸다.

1차대전의 포연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전후 체결되었던 평화조약들은 하나둘씩 붕괴하기 시작했고, 유럽의 동맹정책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유럽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할 때 미국은 '중립법(Neutrality Act)'을 제정해 유럽의 동맹정책에 대한 개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독소불가침조약으로 소련의 중립까지 보장받은 독일이 1939년 폴란드를 침공했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말았다. 미국은 2년 후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이 하와이를 공습하자 그제야 전쟁을 선포했다.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을 치른 후에야 미국의 정치인들은 미국이 고립주의와 반(反)동맹으로 일관하면 세계대전과 같은 대재앙이 발생한다는 값비싼 교훈을 체득했다. 전후 국제질서를 미국이 주도해 재구축하기로 했고 이를 위해 한편으로는 유엔과 같은 국제제도를, 다른 한편으로는 건국 아버지들이 그토록 반대한 동맹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동맹정책과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의 동맹정책에는 큰 차이가 있다. 당시 유럽의 동맹정책이 철저히 이익에 따라 합종연횡했다면 미국의 동맹정책은 대체로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에 기반하고 있다(물론 미국이 안보이익을 위해 우파 독재정권을 지지한 경우도 많다). 그래서인지 미국이 체결한 동맹은 장수하고 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이 창설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나 아시아태평양지역 동맹 모두 70년 이상 장수하며 그동안 국제안보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그런 미국의 동맹정책에 큰 시련이 찾아온 것 같다. 올해 11월 미국 대선의 가장 유력한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의 동맹관 때문이지만, 트럼프의 동맹관은 미국 국민의 정서와 결코 무관치 않다. 트럼프의 당선 여부를 떠나 미국의 동맹정책에는 이미 큰 타격이 발생했다.

1948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나토를 발족시키려 할 때 적지 않은 공화당 의원의 반대에 부딪혔다. 일부 의원은 워싱턴 대통령의 이임사를 소환하며 나토 창립에 반대했다. 당시 유력한 공화당 대선 후보 아서 반덴버그 상원 외교위원장이 초당적으로 협력하지 않았다면 나토가 탄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만큼 미국의 반동맹 DNA가 뿌리 깊다는 얘기다. 미국이 동맹정책을 사용한 지 70년이 됐다.
250년 가까운 미국의 역사에서 70년은 상당히 예외적인 기간이었을 수도 있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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