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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관칼럼] 투자원활화 협정, 다자통상의 미래

이유범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3.10 18:49

수정 2024.03.10 18:49

정인교 통상교섭본부장
정인교 통상교섭본부장
"땅. 땅. 땅." 필자와 칠레의 대표가 함께 두드린 의사봉 소리가 400여명으로 가득 찬 아부다비 회의장 안에 울려 퍼졌다. 제13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MC-13) 개막을 하루 앞둔 2월 25일 '개발을 위한 투자원활화(IFD) 협정'의 역사적 타결을 알리는 소리였다.

필자는 동 협정의 공동의장으로서 124개 참여국을 초청, 협정 타결을 기념하는 행사를 주재했다. 이어 IFD 협정이 WTO의 일부인 '복수국간협정'으로 편입되도록 각료회의 결정을 요청하는 제안서도 상정했다.

'개발을 위한 투자원활화'는 2017년 열린 MC-11에서 복수국간협상으로 시작, 2022년 7월 한국과 칠레가 공동의장을 수임한 이후 협상이 급진전됐다. 동 협정은 투자조치의 투명성을 강화하고 관련 행정절차를 간소화함으로써 개도국 내 외국인 직접투자를 촉진하는 데 목적을 둔다.
참여국은 현재 166개 WTO 회원국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124개국이며, 이 중 개도국은 최빈개도국 26개국을 포함한 90개국이다. 글로벌 투자촉진을 위한 다양한 활동이 1990년대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은행 등에서 지속돼 왔지만 WTO에서 최초로 투자원활화에 중점을 둔 다자간 투자규범이 마련된 것이다. 동 협정은 WTO의 미래와 관련해 아래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IFD 협정은 위기에 처한 WTO의 협상 기능을 회복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WTO 협상은 컨센서스, 즉 어느 회원국이라도 반대하지 않아야 타결되는 방식을 따른다. 그러나 현재 WTO 내 개도국 그룹은 WTO 출범 당시 일괄타결 방식으로 어쩔 수 없이 수용했던 협정들이 선진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하다며 재균형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불만과 불신이 컨센서스를 오남용하는 전략을 택하게 만들고, 새로운 의제에 대한 협상은 한 걸음도 못 나가고 있다. 지난 30년간 WTO에서 새로운 다자규범으로 타결된 것은 무역원활화협정과 수산보조금협정(1부)에 그친다. 이에 따라 특정 의제에 대해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이 협상을 추진하고, 관심 있는 국가들의 추가 참여를 열어두는 복수국간협상이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IFD 협정은 WTO 출범 30년 만에 처음으로 WTO 규범집에 복수국간협정을 추가하는 사례다. 이는 진행 중인 전자상거래 등 여타 복수국간협상에도 선례가 될 것이고, 디지털·기후변화 등 통상환경 변화에 대응해 WTO 협상 기능을 현대화하는 역사적 출발점이 될 것이다.

또 IFD 협정은 다자무역체제 내에서 '개발'에 대한 미래지향적 대안을 제시한다. 글로벌 사우스의 부상으로 WTO에서 개발이 핵심 의제로 논의되고 있지만, 기존 협정상 개도국 특혜 확대 등 과거지향적 접근에 머물고 있다. MC-13 중 개발회의 등에서 WTO 사무총장과 많은 장관들은 IFD가 개도국의 글로벌 투자유치와 공급망 통합을 촉진, 개발에 기여할 것이라며 지지를 표명했다. 지속가능개발목표(SDG)를 달성하기 위해 개도국이 필요로 하는 투자수요와 실제 투자 간에는 4조달러의 갭이 존재한다고 한다. IFD는 이러한 갭을 메우는 진정한 개발지향 협정이 될 것이다. 이번 각료회의에서도 오래도록 복수국간협상 자체를 반대해온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벽을 실감했다. 금번 각료회의에서 IFD의 WTO 법적 편입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제네바에서 일반이사회를 통해 향후 IFD 협정의 편입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한국은 자유무역과 개방적 투자환경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룬 경험을 갖고 있다. 이러한 경험이 한국이 투자원활화협정 의장국으로서 당당하게 역할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길을 앞서서 개척하는 글로벌 중추국가로서 자부심을 느끼면서, 또 한편으로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개도국의 기대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정인교 통상교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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