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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숙 칼럼] '마스가'의 기회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8.04 19:34

수정 2025.08.04 19:51

조선은 한강의 기적 상징
속도와 신뢰, 가장 큰 자산
美와 협력·상생의 길 찾길
최진숙 논설위원
최진숙 논설위원
대통령 박정희가 담배를 하나 꺼내 피워 물면서 정주영 현대 회장에게 한 개비를 권한다. 바로 불을 붙여주며 말을 이었다. "조선사업을 시작할 때 이 일이 쉽다고 생각했습니까. 일본, 미국이 안되면 유럽에 나가 돈을 구해보세요. 방법은 반드시 있을 겁니다." 정 회장이 훗날 현대의 조선업 출발점을 묻는 기자들 질문에 당시를 지목하며 떠올린 장면이다.

'겨레의 빈곤 탈출'이 시대 과제였던 시절 정 회장의 해외 차관기는 파란만장했다.

뉴욕 금융가를 돌며 자금을 요청했을 때 그는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았다. 기술도, 경험도 없는 나라가 배를 만들 능력이 있겠느냐는 핀잔이 쏟아졌다. 도쿄도 다르지 않았다. 사업을 관두겠다며 찾아간 곳이 청와대였으나 그곳의 비장감 넘치는 분위기에 마음을 바꾼 것이다.

500원짜리 지폐 뒷면에 찍힌 거북선을 들이밀며 영국 바클레이스 은행을 설득한 일화가 그 후 나온다. 한국은 1500년대부터 거북선을 만들었으니 조선업 역사가 500년이라는 주장에 관계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클레이스는 자금을 대는 조건으로 배를 사 갈 선주를 요구했다. 그리스 선박회사 리바노스가 여기서 등장한다. 선주에게 보여줄 것은 울산 미포만 사진 한장밖에 없었지만 정 회장이 내건 조건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틀림없이 정한 날짜까지 좋은 배를 만들기로 한다, 이 약속을 못 지키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준다, 배에 하자가 있으면 배를 인수 안 해도 좋고 원금은 다 돌려주겠다.'

남은 건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기록을 보면 실제 선박 수주는 1970년 12월, 조선소 부지 조성은 1971년 4월, 조선소 기공식은 1972년 3월이다. 선박 건조는 1973년 3월 시작됐는데 현장 도크가 완공된 것은 1974년이다. 이 기간 블록들은 맨바닥에서 만들어졌다. 리바노스에 선박이 인도된 것은 1974년 11월이다. 선박 건조 경험이 전무했던 현대가 순식간에 글로벌 최상위 조선사로 뛰어올랐다. 한국 조선업의 스피드, 납기 준수, 신뢰의 자산은 그렇게 쌓였다.

한국 조선업은 1990년대 후반 일본을 제치고 최강의 위치에 오른 뒤 10여년 동안 그 지위를 잃지 않았다.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고부가가치 선박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과 해양플랜트 기술은 지금도 압도적 우위에 있다. 그러나 산업 위기는 어느덧 들이닥쳤다. 2010년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물동량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업체 간 저가 경쟁에 시달리다 기나긴 침체의 터널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위기 징후는 그 전부터 있었다.

중국의 맹렬한 추격이 가시화된 것이 2000년 들어서다. 덩샤오핑 시절 조선업을 해양굴기 발판으로 삼은 이후 막대한 비공개 보조금이 국영 조선사로 흘러들어갔다. 중국은 2002년 보란 듯 해양강국을 선포했고, 선박 수주량은 2000년대 중반 국내 업체 턱밑까지 쫓아온다. 2020년 이후 결국 중국은 세계 상선의 50% 이상을 차지하며 조선강국에 이른다. 선박 기술은 이 기간에 군함 건조능력을 확 끌어올렸다.

중국의 조선 부흥기는 정확히 미국 상선의 쇠락기와 일치한다. 레이건 정부 이후 신자유주의 기조 아래 보조금이 사라지고 기업보호 장벽은 높이 세워졌다. 인건비는 치솟고 경쟁이 사라진 생태계는 지리멸렬의 길을 갔다. 종전 후 전 세계 선박 90%를 차지했던 미국의 점유율은 이제 한자릿수로 고꾸라졌다. 중국의 선박 건조능력은 미국의 200배가 넘는다. 미국이 어찌 다급하지 않겠는가.

우리 정부의 미국 조선업 재건을 뜻하는 '마스가(MASGA)' 프로젝트가 대미 관세협상의 지렛대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한다. 맨바닥에서 블록을 만들어낸 집념과 근성을 미국에 전수할 사명이 주어졌다. 무너진 생태계에서도 항공모함, 이지스함 등 군함기술에선 그래도 미국이 어느 나라보다 한 수 위다. 미국과 윈윈의 길은 따로 있다는 뜻이다. 그 대신 긴장을 놓치면 미 선박 하청업체 신세를 못 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기업은 한정된 자원으로 울산, 거제, 군산의 조선소도 다시 살려내야 한다. 실로 무겁고 현실적인 주제다.
정부가 마스가 플랜을 다듬고 또 다듬어야 할 것이다.

jins@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