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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사람이 된거 같아" 애들 떠난 집에 둘만 남은 부부 '어색한 침묵' [은퇴자 X의 설계]

김기석 기자,

정명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10.04 08:30

수정 2025.10.04 08:12

[4] 자녀 독립 후 찾아온 공허함... '빈 집 증후군'
50대 중년 여성 68%, 자녀 독립 후 심리적 상실감 경험
"돈 벌어오는 우리 아빠" 역할 상실한 남성들도 공허감
'가정의 중심' 자녀→부부로 되돌리는게 제2인생 첫걸음
자녀들이 모두 성장해서 떠난 집에 홀로 남은 여성들이 느끼는 정신적 공허감을 '빈둥지 증후군'이라고 한다. "다 지나가는거야"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마음의 병이 깊어지면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경고다. /AI '뤼튼' 생성형 이미지
자녀들이 모두 성장해서 떠난 집에 홀로 남은 여성들이 느끼는 정신적 공허감을 '빈둥지 증후군'이라고 한다. "다 지나가는거야"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마음의 병이 깊어지면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경고다. /AI '뤼튼' 생성형 이미지

은퇴자 X의 설계
은퇴자 X의 설계

[파이낸셜뉴스]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아이들 방문을 열어봐요. 당연히 아무도 없죠. 저녁 준비를 하다가도 '아, 이제 두 명 분만 하면 되는구나' 싶으면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고요."

경기도 분당에 사는 김미숙씨(54)는 지난달 막내아들이 군입대를 하면서 처음으로 '빈 집'을 경험했다. 첫째 딸은 이미 2년 전 결혼해 독립한 상태. 30년 만에 처음 맞이한 '나만의 시간'은 그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특히 이번 추석은 더 힘들다. 막내는 군대에서 휴가를 나올 수 없었고, 딸은 시댁에 가야 해서 집에 오지 못한다고 한다. "명절이면 항상 북적이던 집이 텅 비어 있으니까...식사를 준비하면서도 '누굴 위해 이걸 하고 있나' 싶더라고요. 남편도 '그냥 우리 둘이 외식할까?' 했는데, 그 말이 더 서럽게 느껴졌어요."
김씨는 연휴가 시작되자마자 휴대폰을 놓지 못했다.

아들에게 몇 번이나 카톡을 보냈고, 딸에게는 "시댁 가면 힘들지 않니?" "밥은 먹었니?"라고 연락했다. 딸이 "엄마, 나 괜찮아. 너무 연락 많이 하지 마"라고 했을 때, 자신이 집착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김씨는 최근 남편에게 "이제 우리 둘이서 여행도 다니고 좋은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근데 솔직히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30년간 엄마로만 살았는데, 그 역할이 끝나니까 내가 누군지 모르겠더라고요."

평균수명 83세 시대, X세대의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상실'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은퇴자는 직장에서의 정체성을 잃는 것만이 아니다. 자녀들이 독립하면서 가정에서의 역할마저 급격히 줄어든다. 특히 수십년간 '엄마'로만 살아온 여성들에게 이 변화는 예상보다 큰 충격이다. 이른바 '빈둥지 증후군(Empty Nest Syndrome)'을 겪는 것이다.

늦은 결혼, 늦은 출산.. 50~60대에 겪는 상실감

빈둥지 증후군이란 자녀가 성인이 되어 독립하면서 집을 떠난 후 부모가 경험하는 상실감, 공허함, 우울감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다. 새가 알을 낳고 새끼를 정성스럽게 키우다가 어느 날 새끼들이 모두 날개를 펼치고 떠나버린 후, 어미새가 텅 빈 둥지를 바라보며 느낄 법한 심정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의학계에 따르면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처음 기술된 이 현상은 중년기 부모에게 상실감, 허탈감, 그리고 자기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동반하는 전환기적 삶의 단계로 인식된다.

의학적으로는 질병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그러나 심할 경우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한 심리적 현상이다.

과거에는 40~50대 부모가 자녀 독립과 동시에 이 증후군을 주로 겪었다. 하지만 현재는 초혼·초산 연령이 늦어지면서 50~60대에 빈 둥지를 경험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평균 초혼 연령 /그래픽=정기현 기자
평균 초혼 연령 /그래픽=정기현 기자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024년 기준 남성의 평균 초혼 연령은 33.9세, 여성의 평균 초혼 연령은 31.6세로 조사됐다. 이는 지난 1995년에 비해 남자는 5.5년, 여자는 6.3년 늦춰진 것이다.

연령별 출산도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2005년까지는 20대 후반에서 가장 높았지만 2010년부터는 30대 초반이 가장 높다. 구체적으로는 1995년 엄마의 평균 출산 연령은 27.9세였지만 2024년에는 33.7세로 5.8세 높아졌다. 같은 기간 아빠의 평균 연령도 31.1세에서 36.1세로 5.0세나 상승했다.

이에 따라 자녀가 대학을 졸업하거나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시점에 부모의 나이는 50대 중반~60대 초반에 이르게 된다.

일산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정슬아 교수는 "자녀 독립은 부모 세대에게 큰 전환점이 된다"며 "최근에는 출산 연령이 높아지면서 은퇴와 맞물려 겹치는 경우도 많아 경제적·사회적 역할의 변화와 심리적 상실감이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헬리콥터맘' '라이딩 맘'...한국 부모들이 더 심각한 이유

빈둥지 증후군은 미국에서 먼저 정의를 내릴 정도로 서구에서 먼저 인지된 증상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특히 우리나라에서 그 심각성이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3년 가족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자녀가 독립한 후 50대 부모의 68%가 "심리적 상실감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우리나라에서 부모들의 빈둥지 증후군이 심각한 가장 큰 이유는 '자녀 중심 문화'다. 한국 부모들은 자녀의 학업, 진로, 결혼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과도하게 개입하며, 자녀의 성공과 실패를 곧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헬리콥터맘' '라이딩 맘' 등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단어들이 우리나라에서는 별 거부감없이 사용된다. 오히려 이를 하지 않으면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미안함도 든다.

실제 여의도에서 대치동까지 매주 라이딩을 하는 50대 주부 이미연씨는 "힘들 때가 있다. 그러나 아이가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데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아이가 길에 뿌리는 시간을 줄일 수 있도록 이사를 하는 것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교육부와 통계청의 2023년 사교육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초·중·고생의 월평균 사교육비는 41만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가구 소득 대비 사교육비 비중도 13.3%로 매우 높다. 많은 부모들, 특히 어머니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자신의 경력과 꿈을 포기하고 '전업 매니저' 역할을 자처한다.

빈둥지 증후군 자가진단 체크리스트 /그래픽=정기현 기자
빈둥지 증후군 자가진단 체크리스트 /그래픽=정기현 기자

갱년기와 겹쳐 '더블 펀치'

빈둥지 증후군은 주로 중년 여성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자녀 독립 시기(보통 50대 중반)가 여성의 갱년기와 겹치면서 '더블 펀치' 효과를 낸다.

이는 여성이 주 양육자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고, 특히 폐경으로 인한 호르몬 변화와 겹칠 때 그 증상이 더욱 심각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갱년기를 맞은 여성들이 빈둥지증후군을 겪으면 "나는 그동안 집에서 어떤 존재였는가?" 또는 "나의 가치는 무엇인가?"에 대한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특히 전업주부일 경우 증상이 더 심각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질병관리청의 2023년 지역사회 건강조사에 따르면, 50대 여성의 우울감 경험률은 11.6%로 40대(9.9%), 60대(11.5%)보다 높다. 이는 갱년기 증상과 빈둥지 증후군이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는 부부관계까지 영향을 미친다. 자녀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사라진 후 부부가 서로에게 집중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지만 관계가 소원했을 경우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물론 빈둥지 증후군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성들도 자녀 독립 후 상실감을 경험한다. 특히 자녀와의 관계에서 경제적 지원자 역할에만 집중했던 아버지들은 자녀가 경제적으로 독립하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서울 강남구의 회사원 정태호씨(57)는 "아들이 취업하고 돈을 벌면서 내 역할이 뭔지 모르겠더라"며 "그동안 경제를 책임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들과 더 가깝게 지내고 싶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하면서 오히려 멀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라고 털어놓았다.

우울증에 불면증..."엄마, 전화 좀 그만해" 자녀에 빈번한 연락도 집착

'빈둥지 증후군'의 증상으로 불면증을 호소하는 중년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진=뉴시스
'빈둥지 증후군'의 증상으로 불면증을 호소하는 중년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진=뉴시스

빈둥지 증후군의 증상은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 따르면 주요 증상들로는 심리적으로 지속적인 우울감과 슬픔, 공허감, 무력감, 자녀에 대한 과도한 걱정, 정체성 혼란, 자존감 급격한 하락 등이 나타난다.

신체적 증상도 심각하다. 불면증 또는 수면 패턴 변화, 식욕 부진 또는 과식, 만성 피로감, 두통, 어깨 통증, 소화불량, 위장 장애 등이 대표적이다. 행동적 변화로는 자녀에게 과도하고 빈번한 연락, 사회적 고립, 은둔, 새로운 활동에 대한 의욕 상실, 알코올 의존도 증가, 과소비 등이 나타날 수 있다.

이같은 증상은 우울증으로 이어지게 된다. 강동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조아랑 교수는 "우울증은 단순히 스트레스 하나 만으로 발생하진 않는다"며 "스트레스에 대한 대처방식이나 적응력, 심리적 능력, 개인의 취약한 소인, 인지적 수용의 정도, 생물학 신경해부학 심리사회적 요인 등이 어우러지면서 우울증이 발병한다"고 말했다.

또 계절적인 영향으로 심해지는 경우도 있다.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정석훈 교수는 "자녀들이 독립해 집을 떠나면서 느끼는 우울증세인 '빈둥지 증후군'의 경우에도 늦가을부터 초봄에 많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이제 진짜 내 인생" 마음만 바꾸면 '다시 찾은 자유'

그러나 빈둥지 증후군을 극복하면 새로운 기회가 올 수 있다.

부산에 사는 최순자씨(59)는 "처음엔 허전했지만 이제는 자유롭다"고 말한다. "그동안 못 했던 여행도 하고, 요리 클래스도 다니고... 남편과 둘이서 하는 시간도 나쁘지 않더라고요. 이제야 진짜 '내 인생'이 시작된 것 같아요."
실제로 통계청의 2024년 고령자통계에 따르면 65~79세 고령자의 평생교육 참여율은 23.5%에 달한다. 한국교육개발원의 2024년 평생학습 개인실태조사에서도 전체 성인의 평생교육 참여율이 33.1%로 나타나 중장년층의 학습 의욕이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3년 국민문화예술활동조사에 따르면 50대 이상의 문화예술 활동 참여율이 2018년 22.1%에서 2023년 31.4%로 크게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빈둥지 증후군을 인생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유희정 교수는 "자녀의 독립은 부모 역할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이를 상실이 아닌 성취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부모 역할에만 매몰되지 않고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일찍부터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특히 40대부터는 자녀 독립 후의 삶을 구체적으로 계획해보길 권한다"고 조언했다.

빈둥지 증후군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적응 과정이지만, 장기간 이어지면 삶의 질을 크게 떨어뜨릴 수 있다. 자녀의 독립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받아들이고, 건강한 생활 습관과 사회적 관계망을 유지하는 것이 정신건강을 지키는 핵심 전략이다. 무엇보다 이 시기를 '잃어버린 시간'이 아닌 '새로 얻은 시간'으로 인식하는 마음가짐의 변화가 가장 중요하다.

'은퇴=퇴장'이라는 낡은 공식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평균수명 83세 시대, X세대가 본격적인 은퇴를 맞이하면서 기존의 은퇴 개념 자체가 재정의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 2막' 이야기를 담은 [은퇴자 X의 설계]가 매주 토요일 아침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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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skim@fnnews.com 김기석 정명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