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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PBS 폐지로 대형 프로젝트 성과 기대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8.24 19:10

수정 2025.08.24 19:30

이호성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원장
이호성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원장
30여년 전 젊은 연구원이었던 나는 한 움큼의 서류를 들고 원장실 문을 두드렸다. 손에는 수백장의 자료와 논문이 있었는데, 방문 목적은 단 하나였다. '세계적 수준의 원자시계를 국내 독자기술로 개발하려면 장기간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연구과제는 3년 단위로 편성됐었고 그 이상의 장기 연구는 드물었다. 나는 방대한 자료를 펼쳐 보이며 단 3년 만에 세계적 수준의 원자시계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과 이 연구는 국가 차원에서 추진해야 할 과제이므로 장기적인 예산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행히 당시 원장님은 내 주장을 받아들여 연구비를 계속 지원해 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맨땅에서 시작해 20년간의 노력 끝에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시간표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 결실이 바로 세슘원자시계 'KRISS-1'이다.

이를 토대로 후배 연구원들은 우리나라 시간표준 기술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켰고 지금은 전 세계 시간의 기준인 세계협정시(UTC) 생성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이 프로젝트가 기관 고유사업이 아닌 단기간 연구를 지원하는 외부 사업으로 수행됐다면 과연 이러한 성과 창출이 가능했을까?

30여년 전 도입된 연구과제중심제도(PBS)는 정부출연연구기관 연구자가 외부과제를 수주해야만 기관 인건비를 충당하는 제도다. 도입 초기 연구효율을 높이고 성과 중심 평가체계를 마련함으로써 연구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긍정적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단기 성과에 치중한 소규모 과제 수행이 늘어나 대형 연구과제를 소홀히 하고 기관 본연의 임무에 부합하는 연구 주제마저 뒷전으로 밀리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오늘날 우리는 기술패권 경쟁 시대라는 새로운 환경에 직면해 있다. 인공지능(AI), 양자, 반도체, 국방, 바이오 등 전략기술 분야에서 기술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국가임무 중심의 대형 연구성과 창출'이 필수적이다. 이번에 발표된 역대 최대 규모의 2026년도 정부 연구개발 예산안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반영해 '기술주도 성장'을 뒷받침하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다.

이번 예산안에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이 단기 과제 중심의 구조에서 벗어나 중장기·대형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과학기술 제도 기반을 새롭게 정비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PBS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그 재원을 기관 출연금으로 재배분하는 구조 개편안을 담았으며, 2026년 첫걸음으로 약 5000억원 규모의 '전략연구사업'을 신설해 국가임무 중심 연구를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재정적 토대도 마련했다.

PBS 폐지는 단순한 하나의 제도 변경이 아니라 연구자들이 장기적이고 도전적인 연구를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열어주는 신호이자 국가 차원의 대형 연구성과 창출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필연적 변화다. 앞으로 연구자들은 인건비 확보 부담에서 벗어나 기관 임무에 부합하는 연구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불필요한 과제 수주 경쟁이 줄고 국가 목표에 맞춘 다분야 융합연구와 공동 대형 프로젝트가 촉진되면서 연구기관 간 시너지 있는 성과 창출도 한층 강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은 국가 과학기술 발전의 산실로서 지난 수십년간 혁신적 연구개발을 통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을 견인해 왔다. 이제 정부출연연은 그동안 축적한 경험과 성과를 바탕으로 시대적 요구와 국가적 책무에 부응하기 위해 더욱 진화해 나가야 한다.
PBS 폐지와 연구개발 예산 증액을 계기로 우리는 국가경쟁력 강화와 과학기술 주권 확립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길, 그 중심에 정부출연연이 있다.
그것이 우리의 시대적 사명이다.

이호성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