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강남시선

[강남視角]물이 흐르지 않는 시대

안승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9.07 19:37

수정 2025.09.07 19:37

안승현 전국부장
안승현 전국부장

"돈을 물쓰듯 한다."

무언가 아낌없이 낭비하는 모양새를 꼬집을 때 '물쓰듯'이라는 수식이 단골로 쓰인다. 전기, 휘발유 같은 것들을 빗대어 '휘발유 쓰듯 한다'는 표현은 없다. 그것들을 그렇게 낭비하듯이 쓰는 사람은 없어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예로부터 우리는 물을 그냥 하늘이 공짜로 떨궈주는, 그래서 여기저기 아무나 가져다쓸 수 있는, 마음껏 써도 아까워할 필요가 없는 그런 물질로 여겼다는 점이다.



가뭄으로 말라버린 강릉의 오봉저수지 바닥에서 20년쯤 전에 가라앉은 것으로 보이는 티코 한 대가 발견됐다는 소식에 솔직히 많이 놀랐다. 재난지역으로 선포될 만큼 강릉 가뭄의 심각한 사태는 익히 알았지만 얼마나 말라붙었길래 진짜로 맨바닥을 드러냈다는 걸까.

강릉의 가뭄 사태가 충격적인 것은 불과 60㎞ 떨어진 속초와 상황이 너무 달라서다. 속초는 1998년 첫 지하댐을 건설하고, 2021년 제2 지하댐까지 완공했다. 극심한 가뭄에도 석 달은 버틸 수 있는 비상 식수원이다.

강릉에서 생수병을 보급해 주민 식수를 해결하고 있을 때, 이번 여름 속초에서는 물을 그야말로 폭탄처럼 들이부으며 축제를 열었다. 하늘과 땅 차이라는 표현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2018년 즈음 이스라엘에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다. 공항 상공에서 내려다본 땅 전체가 황토색이었다. 이게 사막국가인가 싶었는데, 이스라엘은 전혀 물이 부족하지 않은 나라였다. 사막 한복판에서 농업 생산을 왕성하게 벌일 정도로 물이 풍부했다. 단 한 방울의 비도 그냥 버리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수자원 관리기술을 발전시켜온 결과다.

싱가포르는 한때 말레이시아에서 물을 수입하던 도시국가였다. 지금은 자신들의 브랜드를 단 재생수를 수출한다. 물 자립률은 60%를 넘었다. 아랍에미리트(UAE)는 태양광 담수화로 탄소중립과 물 확보를 동시에 추진 중이다.

강릉과 속초가 올해 겪고 있는 상반된 상황은 사소한 관점의 차이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투자와 준비가 달랐다. 속초는 물을 전략자원으로 봤고, 강릉은 하늘이 주는 선물로 봤다. 한쪽은 땅을 파서 물을 저장했고, 다른 쪽은 하늘만 쳐다봤다.

대규모 반도체 단지를 조성하기 위한 부지를 고를 때 가장 먼저 따지는 게 안정적인 전력과 물을 확보할 수 있는지 여부다. 반도체 공장 하나가 하루에 쓰는 물이 대략 10만t이 넘는다. 도시 하나가 쓰는 양이다. 물이 없으면 산업도 없다. 이제 물은 석유와 같은 '핵심자원'으로 봐야 한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정수기술을 갖고도 물을 전략산업으로 키우지 못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간 정책부서 간에 불협화음이나 서로 딴소리만 하면서 세월을 보낸 대가일 것이다. 민간기업의 진입장벽도 높다.

강릉은 1990년대부터 주기적으로 물 부족에 시달렸다. 2002년 태풍 루사 때는 나흘간 단수를 겪었고, 2009년에는 바닷물로 산불을 껐다. 근본대책 마련에는 더뎠다. 매년 '물 아껴 쓰기' 현수막만 내걸었다는 게 이번 사태로 나오는 비판이다. 긴장해서 실수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비를 기다린다'는 강릉시장의 발언은 그래서 더 아쉽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빗물을 기다리는 기도가 아니다. 땅을 파고, 기술을 개발하고,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물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오봉저수지 저수율 15% 붕괴는 강릉의 위기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산업기반의 목마름을 보여주는 지표다. 강릉의 오늘이 가까운 미래 우리나라 전체가 겪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때다.
하늘만 보면서 비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삽을 들고 밖으로 나가 우물이라도 하나 더 파야 할 때라는 얘기다.

ahnman@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