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차례상에 오른 큰 배, 왜 싱겁고 금세 무를까
알고 보니 식물 호르몬으로 급히 키운 탓
[파이낸셜뉴스] 추석 제수용 배를 비싼 값에 샀는데 크기만 크고 달지 않거나 과육이 금세 무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평소에 사 먹는 배는 대체로 달고 맛있지만, 추석이라고 신경 써서 고른 배가 맛이 없으면 오랜만에 모인 가족끼리 나눠 먹기도 난감하다. 수확한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금세 무른다면 ‘식물 호르몬’ 처리를 의심할 수 있다. 이런 배를 사는 소비자도, 파는 상인도 곤란하지만 추석 대목에 맞춰 출하해야 하는 농가의 사정 또한 무시하기 어렵다.
과일 재배에 사용되는 식물 호르몬
식물 내부에도 사람처럼 호르몬이 있다.
최초로 발견된 식물 호르몬은 옥신(IAA)으로 1920년대 인도네시아의 과학자가 식물의 굴광성(빛을 향해 자라는 성질)을 연구하다 어린 싹에서 생장 촉진 물질을 발견한 것이 출발점이다. 옥신은 과일의 낙과 방지와 착과(열매 맺기)를 촉진하는 등의 역할을 해 주로 사과와 토마토, 딸기 등의 재배에 사용된다.
배와 포도 등에 사용되는 지베렐린(GA)은 1930년대 벼의 병해 연구 과정에서 발견됐다. 곰팡이의 일종인 지베렐라 후지쿠로이가 분비하는 물질이 벼를 비정상적으로 길게 웃자라도록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물질을 분리해내 이름을 붙인 것이 지베렐린이다. 지베렐린은 과일의 크기를 키우고 성장을 촉진해 배와 포도 재배에서 개화·수확 시기 조절에 널리 쓰인다.
이 밖에도 잎의 노화를 억제하고 가지 수를 늘려 수확량을 높이는 사이토키닌, 후숙과 개화를 촉진시켜 바나나 유통과정에서 사용되는 에틸렌, 감귤 등의 착색을 촉진하는 앱시스산 등이 있다.
식물 호르몬은 사람의 호르몬 수용체와는 구조적으로 맞지 않아 인체에 무해하다. 농가에서는 식물 호르몬을 사용해 과일의 크기와 색, 수확시기 등을 조절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싱겁고 빨리 무르는 '지베렐린 배'
지베렐린 처리된 배가 무조건 맛을 떨어진다 것은 다소 과장된 인식이다. 지베렐린은 적정한 시기에 적절한 농도로 쓰면 열매 크기와 수확 시기를 조절해 품질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개화기나 착과 직후가 아닌 시점에 쓰거나 농도를 과하게 높이면 과육이 물러지고 당도가 떨어져 맛이 싱거워진다.
조형택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지베렐린은 세포 성장을 촉진해 과육을 크게 만든다"면서 "세포 크기가 커지고 세포벽이 상대적으로 얇아질 수 있어 결과적으로 물리적 충격에 약하거나 연화(무름)가 빨라질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추석 때 맞추려면 어쩔 수가 없다?
제수용 배에 지베렐린 처리가 많이 이뤄지는 것은 추석이 배의 자연스러운 수확 시기보다 대체로 앞서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국내 재배면적의 85%를 차지하는 신고배의 수확기가 9월 하순~10월 초라 대체로 추석보다 늦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촌진흥청은 추석용 품종 개발을 이어왔다. 대표적인 것이 2009년, 신고배와 화산배 교배해 만든 신화배다. 신화배는 신고배보다 약 2주 빨리 익어 추석 제수용으로 유리하다.
그럼에도 신고배가 여전히 재배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데는 재배와 저장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조영식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배연구센터 주무관은 "신고배는 꽃눈이 잘 생기고 유지도 잘되는 편"이라며 "신화배에 비해 재배하기가 덜 까다로운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조 주무관은 "신고배는 올해 수확한 과실을 내년까지 저장할 수 있지만, 신화배는 한 달 정도만 저장이 가능하다"라고 덧붙였다.
호르몬 사용, 소비자가 알 길은 없어
구매하려는 과일이 식물 호르몬을 사용해 재배된 과일인지 아닌지를 일반 소비자가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지베렐린의 경우는 '배 꼭지의 끈적함'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구분법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배 꼭지가 남아있을 때 가능한 판별법이다. 배 꼭지는 유통 과정에서 열매끼리 상처를 낼 수 있어 잘려서 유통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꼭지가 없으면 이러한 판별법도 무용지물이다.
과일 표면이나 꼭지 등에서 식물 호르몬의 흔적을 찾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성능액체크로마토그래피(HPLC)나 질량분석(LC-MS/MS)과 같은 정밀 분석 기법을 통해 과일 속에 미량이라도 남아있는 식물 호르몬의 흔적을 확인할 수는 있다. 다만 이는 특수 장비가 구비된 실험실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또한 농가에서 재배를 위해 인공적으로 사용한 것인지 판단을 내리기도 쉽지 않다. 조형태 교수는 "지베렐린이나 옥신과 같은 식물 호르몬은 과일이 원래도 합성하는 물질이므로 '자연적 농도'와 '외부 처리 농도'를 완전히 구별하기 어렵다"며 "현재로서는 호르몬을 썼는지 안 썼는지 단정적으로 판별하는 방법은 없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 디깅 digging'이라는 말, 들어보셨지요? [땅을 파다 dig]에서 나온 말로, 요즘은 깊이 파고들어 본질에 다가가려는 행위를 일컫는다고 합니다. [주말의 디깅]은 한가지 이슈를 깊게 파서 주말 아침,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 기사를 계속 받아보시려면 기자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sms@fnnews.com 성민서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