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표기하면 유(you)는 당신, 만은 맨(man)
[파이낸셜뉴스] “과연 세 명을 죽일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그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가 개봉 첫주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화제몰이 중이다. 리처드 스타크의 소설 '액스'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해고된 가장 유만수(이병헌)가 재취업을 위해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거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가장인 남자에게 실직은 남성성과 존재가치를 잃어버리는 재앙과 같아서 경쟁자를 없애는 그 남자의 선택은 잔인하지만 인간적이다.
박 감독은 지난달 24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열린 라운드인터뷰에서 “관객이 만수를 이해했다가 다시 도덕적 판단을 하게 되는 그 경계선을 오가는 영화였으면 했다”고 밝혔다.
앞서 미국의 영화 매체 인디와이어는 이 영화를 두고 “탁월하고 잔혹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자본주의 풍자극”이라고 평했다. 박 감독은 “기본 설정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을 풍자하는 것이었지만, 사회학 보고서가 아니라 영화인만큼 연민의 정서가 중요했다”며 “사회적 이슈를 다루되 결국은 개인의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국내외에서 거장으로 평가받지만, 박 감독의 목표는 여전히 관객과의 소통이다. 그는 “오직 관객만 생각한다. 사랑받고 이해받으며, 다음 세대까지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스포일러 있음)
"연민의 정서 기본..사회 보고서 아닌 개인 이야기"
―외신은 이번 작품을 ‘자본주의 풍자극’이라 평했는데,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연민의 정서가 깔려있다고 느꼈다.
▲기본 설정 자체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사람들이 어떤 심정과 욕망을 품고 살아가는지를 풍자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사회학 보고서가 아니다. 결국 감정을 조직해야 하는 예술이니까 연민에 집중했다. 사회적 이슈를 다루지만, 결국은 개인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다.
만수는 사실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조금도 전락하고 싶지 않은’ 중산층적 욕망에 매달린 인물이다. 타인과 비교가 일상화된 인터넷 시대에 조금도 전락하고 싶지 않은 그의 상황이 이해도 된다. 그렇지만 과연 세 명을 죽일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관객도 그를 이해했다가, 다시 도덕적 판단을 하게 되길 바랐다. 그 경계선을 오가는 영화였으면 했다.
―만수를 중산층으로 설정한 이유는?
▲이 이야기가 내 일처럼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계급 전쟁을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라, 같은 계급 안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다. 해고를 당했다고 노조에 들어가거나 소송을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제의 본질을 구조적으로 보지 못한, 좁은 시야에 갇힌 사람의 이야기. 마지막에는 인간 경쟁자를 없애니 AI가 등장한다. 허망한 투쟁으로 끝난다.
―주인공 이름 ‘유만수’ 작명 비화가 있다면?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지점이 있었다. 영어 자막으로 표기하면 ‘유(You)’는 당신, ‘만(Man)’은 남성이 된다. 이번 영화가 남성성을 탐구하는 작품인 만큼, 이름도 그에 어울리게 지었다.
“유지 보수만 수차례”라서 유만수냐고 묻는데, 그 대사는 원래 대본에 없던 것이다. 극중 만수 이웃 역 김형묵 배우의 즉흥 연기에서 나온 대사다. 그 배우가 연기도 뛰어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 그런 즉흥적인 시도가 많았다. 그가 처음 등장할 때 차에서 내려 립밤을 바르는 장면도 배우가 직접 제안한 아이디어였다. 키가 거의 2미터에 가까운 거인이었는데, 제가 만수와 대비를 주고 싶어 일부러 큰 체구의 배우를 찾았다. 그런데 그렇게 큰 인물이 작은 립밤을 바르면서 등장하니 오히려 우스꽝스럽고, 또 캐릭터에도 잘 맞아떨어지더라. 참 좋은 배우로 기억한다.
―극 중에 조용필의 ‘고추잠자리’를 크게 틀어놓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선정 배경은
▲평소에 젊은 세대가 한국의 위대한 가수들을 잘 모르는 게 안타까웠다. 영국·미국 젊은이들은 여전히 비틀스를 아는데, 우리는 왜 이런 명곡들을 잊을까.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소개하고 싶었다. 여러 곡을 대입해봤는데, 가사와 리듬이 만수와 범모, 아라 세 남녀가 몸싸움을 벌이는 그 장면과 가장 잘 맞은 게 ‘고추잠자리’였다. 코믹하면서도 아이러니가 있고. 무엇보다 이 노래를 일부만 들려주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크게 다 들려줄 수 있어서 아주 기분이 좋았다.
―음악과 연기의 조율이 돋보였다. 실제로 편집 과정에서 많은 공을 들이셨다고.
▲조용필의 ‘고추잠자리’나 김창완의 ‘그래 걷자’ 등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사용된 곡은 극중 누군가가 틀어놓은 음악인데, 새로 작곡된 스코어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다. 편집 단계에서 음악과 특정 구간, 배우의 행동이 딱 맞아떨어지도록 시간을 많이 썼다. 결과적으로는 영화 속 드라마와 음악이 한 덩어리처럼 보이게 하는 게 목표였다.
"다음 세대도 즐길 수 있는 영화 만들고파"
―영화가 만수의 ‘가을아 와라’라는 대사로 시작해, 겨울비가 내리면서 끝난다.
▲만수라는 캐릭터를 식물 애호가로 설정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과 계절 변화를 통해 그의 심리를 보여주고 싶었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오는 순간, 그는 모든 것이 결실을 맺을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를 기다린 건 아름다운 가을이 아니다.
―만수를 분재가 취미인 식물인간이라고 설정했는데.
▲원작에는.없는 내용인데 이 모든 게 다 만수를 식물애호가로 설정하면서 시작됐다. 류성희 미술 감독이 팀에 합류하고 가장 먼저 한 말이 “단풍이 있을 때 찍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단풍을 찍기엔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그 제안이 맞다고 동의했기에 서둘렀다. 식물 애호가라 온실을 짓게 되면서 분재를 취미로 설정했다. 기왕 식물을 쓸 거면 그냥 장식으로 나두기
―만수의 아내 미리는 이상적인 아내상으로 다가온다.
▲미리는 낙천적인 성격을 가진, 즐겁게 살 줄 아는 사람이다. 춤추기를 좋아하고 농담도 잘한다. 또 남편보다 훨씬 시야가 넓고 현실적인 사람이다. 남편이 실직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불안해하기보다 오히려 위로해주고, 동시에 남편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취업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댄스파티에는 가고 싶은 평범한 여성이다. 남편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을 하면 그건 나도 같이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남을 탓하지 않고, 가족을 지키는 한 팀으로서 책임감을 가진 성숙한 사람이다.
―이 영화는 때때로 만수와 미리의 멜로물처럼 느껴졌다. 손예진 배우의 출연으로 비중이 더 커진 영향인가?
▲손예진씨가 캐스팅 과정에서 ‘역할이 작더라도 친구들이 이 영화에 왜 출연했는지 묻지만 않게 해달라’고 해서 편집과 후시 녹음 단계까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끝없이 공을 들였다. 예진 씨 주변에 이민정, 이정현, 공효진 같은 무서운 친구들이 있잖냐. 그 약속이 무서웠다. 멜로 드라마적인 결은 애초부터 있었다. 하지만 결말은 보는 사람에 따라 상반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 남자를 어떻게 애 아빠로 같이 살겠어?' 라고 볼 수도 있고, 한편으론 사과나무까지 심었으니까, 가정을 계속 지키겠다는 의지로 읽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두 가지 가능성이 동시에 열려 있는 결말이다.
―이번 작품은 코미디 요소가 강한데 어떻게 접근했나? 또 늘 천만영화가 목표라고 하셨다.
▲제 영화에는 원래 군데군데 웃을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이번 작품은 진지함과 코미디 사이에서 코미디 쪽으로 조금 더 다이얼을 돌린 것뿐이다. 관객이 웃지 않으면 어쩌나 늘 고민한다. 글을 쓰면서도 영화를 찍으면서도 관객이 안 웃으면 어떡하나, 식은땀이 났다. 그래서 많이 물어본다. 또 현장에선 모니터 주변 사람들 반응에 늘 신경을 썼다. 관객이 이해할 수 있을까, 나와 함께 갈 수 있을까. 그리고 좋아할까. 웃거나 환호하거나 심지어 역겨워하더라도, 그 모든 반응이 영화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이해 못하는 영화를 만드는 게 무슨 소용이겠나. 사랑받고 이해되고, 오래 살아남아 다음 세대도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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