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렌터카로 11박' 일주..트빌리시부터 바투미까지 (3화)
[파이낸셜뉴스] 예전에 읽었던 자기개발서인가에서 '인간의 뇌는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독서의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말이었다. 독서를 통한 간접 경험도 우리의 뇌는 직접 경험으로 받아들이니 독서를 많이 하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어쩐지 조금 의문이 남아 챗GPT에게 물어보니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우리가 독서를 할 경우 우리 뇌는 언어적, 상상적 이미지를 통해 이를 간접 체험하게 된다.
다만 독서를 통한 간접 경험은 우리 뇌의 감정뉴런, 운동뉴런, 거울뉴런 회로를 활성화시켜 일종의 가상 체험을 하는 효과를 준다. 신 레몬을 먹는 영상을 보면 맛을 느끼는 뇌 부위가 활성화 돼 침을 흘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1996년 미국에서 개봉한 스릴러 영화 '스트레인지 데이즈'에서는 뇌파신경 자극장치를 통해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내용이 나온다. 사람의 머리에 부착해 가상현실의 경험을 오감과 함께 제공하는 기기다. 실제로 인간의 뇌에 인공칩을 심는 실험을 하는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 역시 이 같은 상상을 현실화하는 기업이다. 인간의 뇌에 직접 전자장치를 연결해 간접경험과 함께 5감 충족까지 시킬 수 있는 시대가 열린다면 사람들은 과연 여행을 하게 될까? 간접 장치를 통해 인간이 물리적으로 여행하기 힘든 우주의 저편이나 심해 3000m 같은 곳까지 갈 수 있다면 말이다. 어쩌면 해당 기술이 보편화되면 가상현실을 통한 여행이 절대 다수의 여행 방법으로 자리잡고, 돈 많은 부자들만 실제로 경험하는 여행에 일부로 돈을 낭비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
조지아 여행의 백미, 카즈베기 주타 트레킹
11일 동안 렌터카로 조지아를 여행하며 최소 1500km, 넉넉 잡아 2000km를 이동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가 약 400km점을 고려하면 서울 부산을 2~3번 왕복한 거리다. 하지만 조지아의 경우 비포장 도로도 많고,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30시간 가량을 차안에서 보냈다. 매일 매일 이동을 반복하고 여행도 즐기느라 피곤했지만 조지아 여행을 마치고 지금와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으라면 단연 '카즈베기 주타 트레킹'이다.
조지아에서 맞는 이틀째 아침, 카즈베기 호텔에서 이른 조식을 먹고 주타로 향했다. 주타 트레킹 지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절벽에 난 비포장 도로를 지나야 하는데 차량으로 들어가기엔 길이 험해서 중간에 내려야 한다. 차량을 주차하면 현지인이 와서 주차료를 받아간다.
주차를 한 곳에서 트레킹 초입길로 들어가려면 4~5km를 더 걷거나, 현지 주민이 운영하는 4륜구동 택시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택시비를 내고 마을 내부로 들어갔는데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었다. 걸음이 느린 편이라 차우키 산 정상까지 찍고 내려오는데 해가 넘어가 아슬아슬하게 트레킹을 마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을에 들어서면 트레킹 길 여기 저기에서 수많은 말똥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말똥 특유의 냄새가 살짝 거슬리지만 트레킹을 하다 보면 따끈따끈한 말똥을 제외하고 건조해진 말똥은 그러려니 하고 밟기도 한다. 트레킹 초입, 해발고도 2360m에 피프스 시즌이라는 카페가 있는데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주타의 절경을 보는 것이 필수코스라고 한다. 우리는 피프스 시즌 전에 있는 '제타 캠핑'이란 곳에 예약을 하고 1박을 했다. 보통 주타 트레킹은 1박 없이 당일치기로 끝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외딴 곳에 있어 숙박비는 물론 호텔에서의 식사도 매우 비싸기 때문이다. 숙소에 들려 체크인을 하고, 여분의 물병에 물을 가득 담아 차우키산으로 향했다.
차우키 호수에서 얼음물 샤워
주타 트레킹은 카즈베기 지역에 있는 트루소 협곡, 스테판츠민다와 함께 가장 인기 있는 트레킹 명소로 꼽힌다. 흔히 조지아를 '아시아의 스위스'라고 하는데 주타 역시 해발 고도도 높고 만년설과 함께 천해의 자연 절경을 볼 수 있어 과연 스위스를 찍먹하는 느낌일까, 라고 생각하게 된다. 주타 트레킹 코스를 '조지아 알프스 입문 코스'라고도 부른다. 조지아의 장점이라면 스위스와 비교해 아주 싼 물가도 빼놓을 수 없다. 1인당 명목 GDP가 한국의 3분의 1, 4분의 1정도라 한국보다 2~3배 비싼 스위스와 비교하면 훨씬 더 저렴하게 여행할 수 있다.
주타 트레킹은 6월에서 9월까지가 가장 안정적이다. 10월에서 5월초까지는 눈이 쌓여 차량 진입이 어렵기 때문이다. 말똥을 피하며, 어쩐지 윈도우즈 배경화면에서 본 것 같은 주타의 트레킹 코스를 1시간 가량 걷다 보면 주타 호수(추아키 호수)가 나온다. 푸른 잔디 사이에 넓게 펼처진 맑은 호수로 주타 트레커에게 1차 쉼터 같은 공간이다. 주타 트레킹 당일치기로 오는 관광객 중 일부는 주타 호수까지만 찍고 돌아가는 경우도 많다.
이곳을 찾은 일부 유튜버들은 주타 호수에서 냉수욕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필자가 같을 때도 흰머리가 성성한 한 서양 아저씨가 속옷 차림으로 호수로 뛰어들었다가 1~2분 만에 다시 나오기도 했다. 일행과 함께 주타 호수에 손을 담그고 누가 오래 참나 내기를 했는데 1분도 지나지 않아 차가운 얼음 꼬챙이로 살을 찢는 것 같은 느낌(엄살이 심하다)이 들어 바로 손을 뺏다. 주타 호수 잔디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미리 준비해온 초코과자와 현지 감자칩을 먹으며 에너지를 보충했다.
고산병이 이런건가요? 불구의 의지로 정상까지
주타 호수를 지나 발길을 부지런히 옮기다 보면 암벽으로 된 만년설이 보인다. 추아키 산이라고 부르는 현지 돌산으로 고도가 높아질 수록 기온도 낮아진다.
처음에는 일행과 별차이 없이 보폭을 맞춰 걸었는데 어느 정도 고도가 높아지자 필자의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 것 뿐이었는데 마치 100m 전력질주를 한 것처럼 심장이 빨리 뛰었다.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걸음을 멈추고 쉰다음에 물을 먹고, 초콜릿도 먹었지만 잠시 쉴 때 뿐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미친듯이 힘들었다. 발걸음이 무겁고 정신도 몽롱해서 눈을 반쯤 감은 상태로 발끝만 쳐다보면서 기계적으로 한발 한발을 들었다 내렸다. 백팩 안에는 물병과 약간의 과자가 들어있었는데 오죽하면 마음속으로 '가방을 좀 대신 들어달라고 할까?'라고 생각하거나, 중간에서 기다릴테니 일행만 먼저 정상을 찍고 내려오라고 말하고 싶었다.
차우키 산의 정상이 눈에 보일 무렵 한 유럽 부부를 만났다. 60대를 넘긴 부부는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편 쪽이 "사람마다 고산병에 견디는 유전자가 달라서 어떤 사람들은 고산 등산을 많이 힘들어 한다"고 했는데 필자가 그런가 보다 했다. 실제로 사람에 따라 두통, 호흡 불편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스위스 부부를 떠나보내고 트레킹을 이어갔는데 그 이후로는 일행과 필자 둘뿐이었다. 대부분 당일치기 트레커들은 주타 패스까지 오르지 않고 호수를 지나 중간에 돌아선 모양이었다. 당초 오후 3~4시쯤 정상을 찍을 줄 알았지만 차우키 패스 정상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하지만 정상에서 기념 사진을 찍을 때 만큼은 묘한 성취감과 함께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하산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지만 산을 오를 때처럼 호흡이 가빠지진 않았다. 2시간 정도 걸려 내려올 수 있었다. 주타 트레킹 초입에 갈림길이 나오는데 올라갈때는 왼쪽, 내려올때는 반대쪽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는 반드시 물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개울이 있었다. 신발이 젖는게 싫어서 맨발로 건너려고 했더니 한여름인 8월임에도 물이 미친듯이 차가웠다. 왔던 길을 돌아서 다시 가야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5분 이상 고민한 끝에 필자가 신발을 신고 일행을 업은 채로 건너기로 했다. 신발을 신고 개울을 건넜음에도 해발 고도 2300m의 계곡물은 엄청나게(엄살이 심하다) 차가웠다.
주타 호수를 지나 숙소인 제타 캠핑에 도착했다. 지구본을 뒤집어 놓은 형태의 야외 컨테이너형 룸이었는데 온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잘 나왔다. 저녁으로는 소고기 스튜, 차가운 가지 샐러드, 요거트 만두 수프를 주문해 먹었는데 시내와 비교해 가격이 2~3배는 비쌌다. 저녁을 먹으며 등산길에 만났던 유럽인 부부와 또 다른 숙소에서 머물고 있는 네덜란드 여자애 하나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조지아에서는 1일 1와인을 하지 않으면 손해라는 생각에 호텔 측에 양해를 구하고 마트에서 산 와인을 저녁과 함께 먹었다. 책으로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하루였다.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