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강남시선

[강남視角] 이건희 선대회장의 'KH 유산'

전용기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10.22 18:38

수정 2025.10.23 09:44

전용기 산업부장·산업부문장
전용기 산업부장·산업부문장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이 존재하던 시절, 수요일 오전 8시 서초사옥 39층은 늘 팽팽한 긴장감으로 하루가 시작됐다.

'수요 사장단 회의.' 삼성 출입기자라면 반드시 취재해야 하는 필수코스였다. 회의가 열리는 날이면 기자들은 오전 7시부터 사옥 앞에 모여 각 계열사 사장들에게 현안을 묻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이른바 '뻗치기'였다.

수요 사장단 회의는 이병철 창업회장 때부터 이어진 전통이다.

주요 계열사 사장 50여명이 모여 전문가 강연을 듣고, 그룹 현안을 공유했다. 삼성의 뻗치기는 시작과 끝을 알기 때문에 무작정 기다리는 다른 뻗치기보다는 '순한 맛'이었다. 하지만 그 '순한 맛'이 '매운 맛'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었다. 당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직접 서초사옥에 등장할 때였다. 그 자리에 없던 기자는 '경위서'를 각오해야 했다. 그의 한마디는 언제나 기사 한 줄을 넘어 시대의 메시지가 됐다.

"새로운 10년은 옛날의 10년과는 다를 것이다."

2010년 12월, 이건희 선대회장이 삼성전자 사옥을 처음 찾으며 남긴 말이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 2020년 10월 25일. 그는 향년 78세로 눈을 감았다. 이건희 선대회장은 생전에 수많은 경영 어록을 남겼다.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라. 극단적으로, 농담이 아니라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시도조차 안 하는 것이 진짜 실패다." 세월이 흘러도 유튜브 영상 속 그의 육성은 여전히 회자된다.

그의 부재 5년. 이건희 선대회장은 여전히 한 시대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살아 있다. 이른바 'KH 유산'이다.

지난 2021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 유족들은 고인의 뜻을 기려 문화예술품 및 의료 기부를 결정했다. 상속세 마련을 위해 재산을 매각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유산의 절반 이상을 사회에 환원한 것이다. 고인의 유산 규모는 약 26조원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1조원에 이르는 의료기부는 소아암·희귀질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및 진단, 치료와 국내 감염병 대응의 컨트롤타워가 될 중앙감염병전문병원 건립의 주춧돌이 됐다.

미술품 2만3000여점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그리고 전국 각지의 지역 미술관으로 향했다.

이는 대한민국 미술사에 전례가 없는 규모의 기증이었다. 국보 14건, 보물 46건이 포함된 2만1600점의 고미술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김환기·박수근·이중섭 등 근대작가의 명작 1600여점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들어갔다. 이후 '이건희 컬렉션'은 전국 35개 전시관을 돌며 350만명의 관람객을 모았다. 국내 미술 전시 역사상 최고 기록이다.

'이건희 컬렉션'으로 불리는 문화예술품 기부는 예술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폭증시켜 한국 미술 시장이 성장하고, 한국 작가들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촉매로 작용했다.

이제 '이건희 컬렉션'은 세계 무대로 향한다. 올해 미국 스미스소니언 미술관을 시작으로, 영국 대영박물관과 미국 시카고미술관 등에서 해외 특별전이 예정돼 있다. 오는 11월부터 내년 2월까지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박물관에서 전시된 뒤 3~7월에는 시카고미술관, 이어 9월부터 2027년 1월까지는 대영박물관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그는 기업가였지만, 동시에 '문화 경영인'이었다. 산업으로 나라를 세웠다면, 문화로 그 품격을 높였다. 재벌 총수로서의 이건희보다 문화 애호가로서의 이건희가 새롭게 조명되는 이유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경영철학을 말하지만, 그보다 더 오래 남을 것은 '눈으로 보는 유산'일 것이다.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 속에는 한 시대를 이끈 기업가의 통찰과 미감이 함께 깃들어 있다. 이제 기자들의 뻗치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듣던 '이건희 어록'은 사라졌다.
대신 미술관 한편에 걸린 한 폭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다.

courage@fnnews.com 전용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