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뉴욕=이병철 특파원】 롤렉스가 공식 중고 시계 사업에서 '수익 포기' 전략을 택했다. 연간 수백억 달러 규모로 성장한 중고 시계 시장에 직접 개입하면서도, 이익보다는 브랜드 가치 보호를 우선시하는 행보다. 전문 되팔이 세력과 위조품이 난무하는 시장 질서를 바로잡아 신품 시장까지 지키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26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롤렉스의 공식 '인증 중고(Certified Pre-Owned·CPO)' 프로그램은 사실상 손익분기점 수준의 수익 구조로 설계된 것으로 평가된다고 전했다. 수익을 남기기보다는 브랜드 신뢰도를 유지하고, 투기적 거래를 억제하는 데 목적을 둔 전략적 선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연 250억달러 중고 시계 시장…롤렉스 "더는 방관 못 해"
롤렉스가 중고 시장에 나선 배경에는 급팽창한 거래 규모가 있다. 위조품과 투기 세력이 뒤섞인 글로벌 중고 시계 시장은 연간 수백억 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특히 롤렉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위조되는 명품 시계 브랜드로 꼽힌다. 소비자가 가짜 제품을 구매할 경우 브랜드 이미지에 직접적인 타격이 불가피하다.
이에 롤렉스는 3년 전 공식 인증 중고 프로그램을 출범시켰다. 시계 데이터 분석업체 워치차트에 따르면 이 프로그램의 2025년 매출은 5억 달러를 웃돌 것으로 추산된다. 주요 공식 판매사인 워치스 오브 스위스는 최근 "인증 중고 롤렉스가 현재 두 번째로 많이 팔리는 제품군"이라고 투자자들에게 밝혔다.
"롤렉스 인증이면 평균 28% 더 낸다"
이 프로그램이 보여준 가장 큰 성과는 '신뢰의 가격'이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롤렉스가 진품 인증한 중고 시계는 그렇지 않은 제품보다 평균 28%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소비자들은 위조품 우려를 덜고, 기계식 시계의 핵심인 정비·작동 상태가 보장된다는 점에 추가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실제로 일부 인기 모델은 중고 가격이 신품을 크게 웃돈다. 빨강·파랑 베젤로 '펩시'라는 별명이 붙은 GMT-마스터 II 신제품은 매장 세금 포함 약 1만 2150달러 수준이지만, 중고 시장에서는 2만 달러를 훌쩍 넘는다. 롤렉스 인증 제품의 중간 거래 가격은 2만 6000달러대에 형성돼 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롤렉스의 역할 설정이다. 롤렉스는 중고 시계를 직접 매입, 판매하지 않는다. 워치스 오브 스위스, 1916 컴퍼니 등 기존 공식 판매사들이 중고 물량을 확보하고 진품 감정과 정비를 담당한다. 롤렉스는 이를 다시 한 번 인증하고 2년 보증을 제공할 뿐이다. 가격 결정권과 수익은 전적으로 소매업체 몫이다.
이는 과거 명품 시계 브랜드가 중고 가격을 직접 통제하다 소비자 반발을 샀던 사례를 의식한 결과로 풀이된다. 업계에서는 브랜드는 기준과 인증만 담당하고 운영은 제3자에게 맡기는 방식이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라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롤렉스가 중고 시장에 개입한 궁극적인 이유는 신품 시장 보호다. 모건스탠리는 롤렉스가 글로벌 신품 명품 시계 시장의 32%를 차지하고 있다고 추산한다. 신품 공급이 연간 약 120만 개 수준에 그치면서 대기 수요가 쌓이고, 이로 인해 중고 시장 프리미엄이 형성되는 구조다. 공식 인증 프로그램은 이런 흐름을 통제 가능한 범위 안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중고 시계 시장 규모는 올해 250억 달러로, 신품 시장의 절반 수준까지 성장할 전망이다. 명품 의류·가방 리셀 시장이 아직 신품 시장의 10%대 초반에 머무는 것과 대비된다.
"수익보다 이미지"…명품업계에 던진 메시지
시장에서는 롤렉스의 전략이 다른 명품 브랜드에도 시사점을 던진다고 평가한다. 에르메스 버킨 백이나 파텍 필립 시계처럼 고가 상품일수록 '공식 보증'에 대한 수요는 커질 가능성이 높다. 다만 롤렉스의 사례가 보여주듯, 리셀 시장 대응은 새로운 수익원이 아니라 브랜드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비용에 가깝다는 점도 분명해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급성장하는 중고 시장을 외면하기는 어려워졌다"면서도 "브랜드가 직접 나서더라도 추가 수익을 기대하기보다는 신뢰와 가치 유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 롤렉스가 던진 메시지"라고 말했다.
pride@fnnews.com 이병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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