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강남시선

[강남視角] 大주식의 시대

전용기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2.01 18:39

수정 2026.02.01 19:50

전용기 산업부장·산업부문장
전용기 산업부장·산업부문장
대(大)주식의 시대다. '꿈의 지수'로 불리던 코스피 5000이 현실이 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선두에 섰고, 현대차가 뒤에서 힘을 보탰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분위기는 달랐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한국을 추월할 것이란 경고가 이어졌고, 자동차 산업은 도요타와 테슬라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라는 진단이 지배적이었다.

반도체도, 자동차도 더는 주도권을 쥐기 어렵다는 회의론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 초 삼성·SK·현대차 3사는 이런 우려를 단번에 뒤집었다.

SK하이닉스는 실적 발표에서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두고 "고객사와 인프라 파트너사들이 당사 제품을 최우선으로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메모리 반도체 격전지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삼성전자 역시 "올해 HBM 매출이 전년 대비 3배 이상 확대될 것"이라며 "고객사들로부터 '삼성이 돌아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했다. 현대차그룹은 'CES 2026'에서 보스턴다이내믹스의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공개한 이후 단순한 모빌리티 기업을 넘어 피지컬 인공지능(AI) 기반 로봇기업으로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코스피 5000을 두고 지방선거를 앞둔 정부의 '부추김'이라는 음모론이 힘을 잃은 배경이다.

외부의 시선도 달라졌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칩 워'의 저자인 크리스 밀러 미국 터프츠대 교수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빅테크의 '대체할 수 없는 파트너'로 격상되고 있다"며 "빅테크와 반도체 공급사 간 갑을 관계도 바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두 회사를 'AI 혁명기의 전략적 문지기(gatekeeper)'로 규정했다. 단순한 메모리 공급자를 넘어 누가 AI 시대에 남고 탈락하는지를 가르는 관문이 됐다는 의미다. '범용화의 덫'이 사라지면서 삼성과 SK가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는 분석도 덧붙였다.

그렇다면 코스피 5000을 이끈 세 그룹 수장들의 인식은 어떨까.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꿈'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위기'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성찰'을 꺼내 들었다. 최 회장은 "엔비디아와 비교하면 SK하이닉스는 지금보다 10배는 더 커져야 한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의 성공 스토리를 담은 신간 '슈퍼 모멘텀'에서 그는 "AI 반도체가 만든 임팩트는 아직 서곡에 불과하다"고 했다. 부친 최종현 선대 회장이 꿈꿨던 '반도체 입국'을 언급하며 "일본 일류 기업보다 나은 회사를 만들겠다고 약속했고, 그 꿈을 이뤄드렸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아직 배가 고프다"고 했다.

이 회장은 최근 임원 대상 세미나에서 "숫자가 좀 나아졌다고 자만할 때가 아니다.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했다. 1년 전 "삼성다운 저력을 잃었다"며 '사즉생'을 언급한 데 이은 두 번째 경고다. 과도한 낙관을 경계하고, 초격차 기술경쟁력 회복에 속도를 내라는 주문이다.

정 회장은 신년회에서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우리를 지켜줄 버팀목은 깊은 성찰에서 비롯되는 체질개선"이라고 말했다. 정주영 창업회장의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라'는 말을 꺼내며, 현대차그룹을 움직여온 힘은 끝까지 도전하는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세 수장의 연초 다짐을 종합하면 코스피 5000은 도착지가 아니라 출발선에 가깝다. 한국 제조업이 다시 글로벌 기술질서의 중심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기대가 커지는 이유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이재용·정의선 회장의 이른바 '깐부 치맥 회동'이 두고두고 회자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만 코스피 5000은 한국 제조업이 다시 기회의 문턱에 섰다는 신호일 뿐, 성공을 보증하는 증표는 아니다. 성과에 무임승차하려는 움직임은 커지고, 올려진 숟가락은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국민들이 내줄 때다.

courage@fnnews.com 전용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