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맨해튼에 사는 한 지인은 이곳에서 '새 아파트'의 기준은 대략 30년이라고 했다. 100년을 훌쩍 넘긴 공동주택이 드물지 않은 맨해튼의 풍경을 떠올리면 자연스러운 인식이다. 외벽에는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구조는 건재하고, 내부는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의 삶을 충분히 담아낸다.
한국은 다르다. 입주 10년이 지나면 '새집'이라는 말이 옅어지고, 20년을 넘기면 재건축 논의가 시작된다.
하지만 2010년 이후 지어진 아파트는 과거와 질적으로 다르다. 외관뿐만 아니라 단열·창호·설비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준공 20년 안팎 단지를 가보면 요즘 짓는 아파트와 큰 차이가 없다는 점에 적잖이 놀란다. 기술은 이미 '오래 쓰는 집'의 단계에 들어섰다.
문제는 우리들의 집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는 집의 수명을 구조적 내구성보다 재건축 가능성과 시세 상승 여력으로 판단해 왔다. 30년이 지나면 허물 준비를 하는 사회에서 10년까지만 새집으로 인정하는 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아파트의 실질적 수명은 기술이 아니라 자본이득 기대심리가 규정해 왔다. '얼죽신(얼어 죽어도 신축 아파트)' 열풍 역시 같은 맥락이다. 새 아파트의 장점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 열기가 '오래 쓰는 문화'를 밀어내고 있는 건 아닌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아직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주택까지 조기에 소모되는 구조는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는 얘기다.
지금과 같은 재건축 모델은 한계에 이르렀다. 도시는 빽빽하고 땅은 한정돼 있다. 멀쩡한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짓는 과정은 막대한 자원과 에너지를 소모하기 마련이다. 그 비용과 탄소배출은 기후위기 시대에 결코 가볍지 않다. 콘크리트와 철근을 반복해 부수고 쌓는 방식이 언제까지 지속 가능할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도 '오래 쓰는 집'의 상징은 있다. 1930년 서울 중구 회현동에 지어진 미쿠니(三國) 아파트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로 꼽힌다. 햇수로 96년이다. 여러 차례 용도가 바뀌고 내부가 손질됐지만 주거건물 구조는 유지돼 왔다. 세월은 흘렀지만 건물은 사라지지 않았고, 허물지 않아도 도시의 기억을 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국내 기술로 지은 건물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미 '시간을 견디는 집'을 경험한 셈이다.
최근에는 100년 거주를 목표로 한 장수명 아파트 실증단지도 등장했다. 구조는 오래 쓰고, 설비와 마감은 교체를 전제로 하며, 평면은 삶의 변화에 맞게 조정하는 방식이다. 기술은 준비돼 있다. 남은 것은 인식과 제도의 전환이다.
이제는 새집의 기준을 다시 정할 때다. 최소 30년은 새집으로 인정하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더 빨리 짓는 집이 아니라 더 오래 살아남는 집이 사회적 자본이 되는 사회, 집과 함께 나이 드는 법을 배울 때 한국의 주거문화는 개발의 시대를 넘어 지속 가능성과 효율적 이용의 시대로 이동할 수 있지 않을까.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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