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적 변곡점 맞은 ESG 경영 김세훈 플로리다大 조교수
글로벌 금융시장서 대두됐던 ESG
지정학적 리스크에 규범 흔들리고
고금리 따른 투자 수익 의문 퍼져
기업들의 저탄소 경영 신뢰도 문제
직접 감축 대신 값싼 상쇄권 의존
무늬만 '넷 제로' 외쳐 진정성 의문
쏟아지는 규제는 시장 혼란 부추겨
외부 압박과 비용 감축 갈등 해법은
규제 늘리기보다 투명한 공시 관건
기후 거버넌스로 내부 감시 강화
성과 연계시 실질적 감축 이어질 것
글로벌 금융시장서 대두됐던 ESG
지정학적 리스크에 규범 흔들리고
고금리 따른 투자 수익 의문 퍼져
기업들의 저탄소 경영 신뢰도 문제
직접 감축 대신 값싼 상쇄권 의존
무늬만 '넷 제로' 외쳐 진정성 의문
쏟아지는 규제는 시장 혼란 부추겨
외부 압박과 비용 감축 갈등 해법은
규제 늘리기보다 투명한 공시 관건
기후 거버넌스로 내부 감시 강화
성과 연계시 실질적 감축 이어질 것
이병철 특파원】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환경·사회·지배구조(ESG)와 지속가능, 기후금융을 바라보는 시선은 과거의 열광과는 대조적으로 차갑게 식어가는 듯 보인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기업 경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불러올 것 같았던 녹색경영 열풍은 현재 심각한 역풍(ESG Backlash)에 직면해 있다. 지정학적 불확실성으로 인한 에너지 안보 문제, 지속가능 투자의 실질적 수익성에 대한 회의론, 그리고 무엇보다 그린워싱(Greenwashing)에 대한 우려가 겹치면서 일각에서는 ESG를 실체가 모호한 도덕적 구호나 이미지 제고를 위한 일시적 마케팅 수단으로 치부하며, 다시 전통적인 이윤 극대화 가치로 회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일부 기업들은 지속가능경영에 대한 언급을 기피하고, 특정 국가 정부들은 기후정책을 후퇴시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은 기후경영의 종말이 아니라 오히려 '질적 도약'을 위한 필연적 진통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회적 규범의 순환
기업 경영의 방향타를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동력은 그 시대를 지배하는 '사회적 규범(Social Norm)'이다. 필자가 최근 진행 중인 연구에서 지난 한 세기 반의 역사적 흐름을 살펴본 바 기업에 요구되는 사회적 규범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적 요구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해 왔다.
19세기 말 노동인권과 공정거래에 대한 요구가 기업의 기본적 경영환경을 변화시켰듯, 현대사회에서 '기후 대응'과 같은 친환경 경영은 단순한 선택이 아닌 기업이 사회로부터 사업 면허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규범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는 도널드 트럼프 정권의 재집권과 함께 미국의 파리협정(Paris Agreement) 탈퇴 및 온실가스 위해성 판정(Endangerment Finding) 철회 등 또 다른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사회적 규범의 영향력이 거시경제와 사회적 유대의 순환성과 결합해 나타나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거시경제적 불확실성이 높고 사회적 형평성에 대한 우려가 고조됐던 1970년대 이전의 시기에는 인권, 궁핍, 차별,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 외부효과에 대한 책임이 기업에 요구되었던 반면 그 이후 경제적·사회적 안정이 달성되면서 환경적 외부효과에 대한 규범과 인식이 확산됐다. 달리 말하자면, 먹고사는 문제 그리고 타 국가의 위협이 선결되지 않는 '생존규범' 중심의 시기에 환경을 감안한 경영은 사치재다. 또한 근래처럼 금융시장에서 불확실성이 높고 투자 기회비용이 부각되는 고금리 환경에서 투자자들이 지속가능성 점수가 높은 펀드와 같은 금융자산을 선호하지 않는 것은 자명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우리는 지금 글로벌 패권 전쟁 속에서 불안정성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으며, 이 순환주기와 상응하는 사회·정치적 변화의 한 부분으로서 ESG 역풍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역으로 터널의 끝에 반복되는 사회적 규범의 반동과 함께 기후금융 시대가 다시 도래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ESG라는 광범위한 카테고리 안에는 많은 사회적 이슈들이 포함되지만, 그중에서도 기후 리스크라는 물리적 현실이 사회적 규범과 무관한 '상수'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모든 경영 패러다임의 변화는 직선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차갑게 식기를 반복한다. 현재의 ESG 쇠퇴기는 순환주기상 거품이 걷히며 어떤 환경·사회적 이슈들이 앞으로도 기업에 과제로 요구될 만큼 본질적일지, 그리고 어떤 정책과 경영전략이 실질적인 해답이 되는지 가려내는 필연적인 '옥석 가리기' 과정이다.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 가치와 기업의 재무적 가치가 일치되는 과정에는 반드시 조정기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ESG 역풍 속에서도 미래를 대비한 저탄소 전환의 내실을 어떻게 다지느냐다.
■기후금융의 신뢰성 문제
저탄소 전환의 방향타는 사실 ESG 역풍의 원인을 살핌으로써 잡을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ESG와 기후금융에 대한 비판에는 여러 근거가 있다. 지속가능 투자의 수익성과 같이 여전히 갑론을박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있는가 하면, 보여주기식 선언에 그치는 그린워싱처럼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난제도 있다. 후자는 필자의 지속가능성 연계 대출(SLL)이나 탄소시장(VCM)에 관한 논문을 비롯해 많은 기후금융 연구에서 흔히 부각되는 문제이다. 가령 지속가능성 연계 대출로 포장된 전 세계 기업 대출의 절반가량은 실제 채무자에게 얼마나 강한 지속가능성 동기를 부여하는지 측정하기 어렵다. 연계성이 불투명한 경우 채무자의 ESG 성과가 대출 이후에도 향상되지 않을뿐더러 채무자가 자금을 인출하지도 않는 경우가 많아 이는 관계금융에 기반한 '허울'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그린워싱 행태와 그로 인해 쌓여가는 불신의 기저에는 정보 비대칭의 문제가 있다. 통상적인 기업 공시 규제는 주주이익 극대화라는 명분에 따라 투명성을 강조한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의 기후공시 규제들은 어느 정도의 탄소배출량과 기후 리스크가 주주 가치에 재무적 중요성(Financial Materiality)을 지니는지 규명하기 어려워 느슨한 가이드라인에 그치거나 광범위한 법적 구속력을 가지지 못해 왔다. 예를 들어 A사가 지속가능성 보고서에 올해 탄소배출량을 20% 감축했다고 공시했을 때, 이것이 탄소시장을 통해 타사의 전환을 후원해 '상쇄'한 것인지 아니면 직접적으로 줄인 것인지 제삼자가 알기 어렵다. 탄소시장을 이용했을 경우에도 어떤 종류의 탈탄소 프로젝트로부터 탄소상쇄권을 구매했는지, 얼마나 비용을 지불했는지 등 탄소감축의 진정성을 판단할 정보가 결여된 경우가 많다.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법적 책임이 없는 상황에서 많은 기업은 이름만 그럴싸한 탄소 상쇄권 등을 통해 그린워싱을 행할 유인을 갖게 된다.
이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도덕적 해이의 전형이다. 기업은 비용 최소화와 수익 극대화를 추구하기에 주주 및 소비자 등 이해관계자(Stakeholder)들의 탈탄소 요구 앞에서 직접 감축과 상쇄 중 값싼 방식을 택한다. 문제는 어떤 방식이 탄소감축에 더 효과적이고 진정성 있는지 알기 어려운 정보 비대칭에 있다. 이러한 불투명성 속에서 피상적인 전략이 실질적인 전략보다 비용이 적게 든다면 기업은 처벌을 피하는 선에서 당연히 전자를 택한다. 이해관계자들에게는 '넷 제로(Net Zero)' 달성이라는 수치로 안도감을 주지만, 실제로는 구조적 전환을 회피하는 '전환 세탁(Transition-Washing)'을 하는 것이다. 결국 기후경영의 장벽은 외부의 탈탄소 압박과 내부의 비용 최소화 욕구 사이의 갈등이다. 그린워싱은 기후경영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핵심 요인이기에 기후금융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서는 이러한 인센티브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기후 거버넌스가 만든 실질 감축 효과
정책 입안자들은 위 이슈에 대한 해답으로 더 많은 규제와 가이드라인을 내놓곤 한다. 가령 도입에 난항을 겪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기후공시안이나 유럽연합(EU)의 지속가능금융 분류체계(Taxonomy)는 기업에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요구한다. EU의 경우 기업, 자산관리업, 그리고 증권업에 걸쳐 저마다 정교하고 복잡한 규제안이 얽혀 있는데 주주 관점의 재무적 중요성에 기반해 법적 구속력의 범위를 정의하려는 노력의 부작용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복잡한 규제가 오히려 이해관계자의 혼란을 증폭시켜 시장의 감시 기능을 저하시킨다는 우려도 크다. 정부의 과도한 개입이 오히려 기업의 효율적이고 창의적인 기후대응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경제학자로서 필자가 제안하는 방향은 규제의 양적 팽창보다는 정밀타격형 규제의 효율적 최적화다. 기업이 그린워싱의 유혹에 빠지는 비용구조와 정보 비대칭의 급소에 최소한의 조치를 취해 진정성 있는 탈탄소 기술의 비용을 낮추고 정보의 질을 향상하는 것이다. 탄소 시장을 예로 들면, 재생에너지 개발 및 탄소 포집·제거 등 유의미한 탈탄소 방식의 비용을 낮추는 기술혁신을 통해 값싸고 신뢰성이 낮은 탄소 상쇄권을 구매할 동기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구개발은 현재 에너지 및 벤처 산업에 걸쳐 자생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정책적으로 세액공제 혜택과 같은 장치로 장려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이 이차전지, 수소 등 국가전략기술과 신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 갖추고 있지만 화석연료 기업의 탄소감축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확장되어야 할 부분이다.
또한 기업이 상쇄권 구매에 지불한 '비용' 정보만 공시하게 하는 것으로도 주주는 비용 파악을 투명하게 할 수 있고, 이해관계자는 기업이 얼마나 값싼 전략을 택했는지 간파할 수 있다. 이러한 최소한의 정보만으로도 소비자의 선택이나 주주의 자본 조달비용 조정 등 시장 기제를 통해 기업의 행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필자의 연구 결과는 이러한 시장 기제의 역할에 힘을 실어준다. 정보 비대칭을 해소하기 위해 기업의 기후대응을 감시하는 시장 기제, 즉 '기후 거버넌스(Climate Governance)' 기능에 희망이 있다. 이사회 내 지속가능성위원회가 있거나 경영진 인센티브가 ESG 성과와 연계될 때 기업은 값싼 상쇄보다 실질적인 감축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탄소배출량이 많아 대중의 엄격한 감시를 받는 석유·가스 업체들일수록 피상적 허울보다는 탄소 포집·저장 기술 등 실질적 탈탄소 전략에 더 활발히 투자한다. 평판 리스크의 한계비용이 진정성 없는 상쇄를 통해 아끼는 투자비용보다 크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 도입을 위해 진행 중인 한국 기후공시제도의 세부 쟁점 정리에 있어 시사점을 던진다.
■ 김세훈 조교수는 플로리다 대학교 워링턴 경영대학 재무·보험·부동산 학과 조교수이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SE)에서 경제학 석사,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재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김 교수는 기업 지배구조, 지속가능성, 기후금융 및 공공 정책과 관련된 이슈에 걸쳐 기업 재무 및 금융 시장 분야를 폭넓게 연구하고 있으며 재무 분야 최상위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해오고 있다.
한미재무학회(KAFA)는 지난 1991년 미주지역 재무 연구자들의 학술적 발전 및 상호교류 증진을 목적으로 발족한 학술단체다. 30여년간 발전을 거듭해 현재 미주는 물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과 유럽, 호주 지역 한인 연구자들의 모임으로 발전했다. 파이낸셜뉴스는 지난 2007년부터 한미재무학회의 학문적 성취를 장려하기 위해 KAFA를 후원하고 있다.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