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북송시대 4대 황제인 인종(仁宗) 때이다. 인종은 평소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인종이 다스리던 북송 시기는 문치가 안정되고 제도가 정비된 시기로 국가가 의관 선발과 의학교육을 제도화하던 때였다.
인종은 어느 날, 어의 왕유덕(王惟德)을 불러 “침구동인(鍼灸銅人)을 만들도록 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인종이 그렇다고 하자, 왕유덕은 “성상께서는 어찌 갑자기 동인을 만들라고 하시는 겁니까?”하고 되물었다. 인종은 “내 보니 요즘 침구 경락과 혈자리가 의서마다 다르고, 침술을 시험할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없다는 것을 애석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침구동인이 있으면 이것이 규범이 될 수 있을 것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인종은 이어서 “또한 지금까지 전해지는 침구학설을 수집하여 오류를 정정해서 다시 편찬하도록 하라. 침구동인은 무거워서 이동하기 어려우나, 침구동인 규격대로 만들어진 책은 쉽게 움직일 수 있으니 책자를 이용하면 널리 배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왕유덕은 침구동인을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을 모았다. 먼저, 침법의 최고 의관을 데려왔다. 그 중 경험이 풍부한 침의 한 명을 책임자로 삼았다. 그는 <침구갑을경>과 <황제내경> 등의 의서를 기초로 해서 경락과 경혈간의 거리를 골도분촌(骨度分寸)을 통해서 비율에 맞게 설계를 했다.
그리고 청동을 주조해서 인형을 만들 수 있는 청동 장인도 데려왔다. 청동 장인은 당시 무기나 종, 불상 등을 만들던 국가급 장인이었다. 청동 장인은 구리와 주석의 비율을 엄격히 조절하여 동인의 전신을 앞과 뒤 두 판으로 주조했다. 침구동인의 앞뒤 동판을 결합하면 온전히 사람 모습을 갖추도록 설계되었다.
동인의 표면에는 혈자리를 표시하고 구멍을 뚫었다. 이렇게 해서 혈자리를 밀랍으로 막아 놓은 상태에서 물을 채우면 물이 새어 나오지 않다가 침으로 정확하게 해당 혈자리를 찌르면 물이 새어 나오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의관들의 침법을 시험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또한 금속 세공과 상감(象嵌)에 능한 장인도 데려왔다. 상감기법에 능한 장인은 혈자리 구멍 옆에 혈명을 음각으로 파고 거기에 금을 채워 넣었다.
왕유덕은 이렇게 해서 1~2년에 걸쳐 시행착오를 거치며 결국 2개의 동인을 제작해서 인종에게 올렸다. 이와 함께 이전에 인종이 함께 명한 <동인수혈침구도경> 3권을 편찬해서 함께 올렸다.
인종은 “수고가 많았다. 침구동인 하나는 의원관에 두고, 다른 하나는 대상국사(大相國寺)의 인제전(仁濟殿)에 두라. 그리고 <동인수혈침구도경>은 인쇄를 해서 천하에 배포하도록 하라.”하고 명했다. 대상국사는 북송의 수도인 동경(東京, 개봉)에 있던 국가 사찰로 그곳의 인제전은 경내에 설치된 의료와 구휼 기능을 담당했던 전각이다. 궁과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인종 말년, 수도 개봉에서는 그해 흉년과 군량 부족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조정은 사찰의 재정과 기물을 점검하여 일부를 거두어들이도록 했다. 대상국사 역시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 대상국사에 있던 침구동인 또한 별도의 명문이나 봉인도 없는 상태로 일반 청동 기물로 취급되어 관청 창고로 이관되었다.
그런데 20~30년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양주(襄州) 지방에 청동동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주는 북송의 수도에서 약 400km 정도나 떨어진 곳이었지만, 남북을 잇는 군사와 물류의 관문으로 중앙에서 관원이 파견되는 핵심 지방이었다.
청동동인은 어찌 된 영문인지 당시 양주의 차관급 관원에 재직 중인 장숙공(章叔恭)이란 관료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장숙공이 청동동인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특히 의원들을 통해서 입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래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장숙공의 집에 조남중(趙南仲)이란 한 관리가 찾아왔다. 조남중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로 의학 관련 기물과 기술을 관리하던 관원이었다.
조남중은 장숙공에게 “이 동인을 어떻게 해서 얻게 되었는가?”하고 물었다. 그런데 장숙공은 얼버무리면서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했다. 사실 장숙공 또한 이 침구동인을 일반 개인이 소장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남중은 장숙공에게 “이 동인은 수십 년 전 인종 황제가 왕유덕에게 명하여 만든 침구동인 중 하나요. 원래 두 개를 만들었는데, 한 개는 지금 황실에 있지만 한 개가 어디에 있는지 행방이 묘연했지만 이제야 찾게 되었으니 이것을 다시 황실에 귀속시켜야 할 것이요.”라고 했다.
장숙공은 “이것이 황실의 물건이라는 증거가 있소?”하고 물었다. 그러자 조남중은 “동인에 새겨진 혈자리가 금을 입힌 상감으로 새겨진 것이 바로 증거요. 상감기법으로 혈자리를 새긴 것은 바로 인종 황제의 어명이었소.”라고 하는 것이다.
장숙공은 어쩔 수 없이 “그렇다면 알겠소. 원래 황실의 물건이었다고 하니 내가 별수 있겠소. 그러나 며칠 말미를 주면 좋겠소.”라고 했다. 이 침구동인이 황실의 물건이라고 하니 버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조남중은 “며칠 후에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실어 가겠으니 준비를 해 두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장숙공은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침구동인에 새겨진 경락과 혈자리를 탁본(拓本) 두 장을 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종 때 만들어진 침구동인은 두 개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장숙공은 떠 두었다는 탁본 또한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여러 문헌을 통해서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일들이 전해질 뿐이다. 오늘날 ‘송나라 침구동인’이라 불리는 유물은 모두 북송 말기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아마도 시대가 바뀌고 나라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전쟁 중에 다른 청동 기물들과 함께 녹여져 병기나 공용 기물로 다시 주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 후대 왕조들 가운데 불교를 국교로 삼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범종이나 불교 용기를 만드는데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북송 초기 인종의 어명으로 주조한 황실 공식 침구동인은 어디에 있을까?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의적고> 銅人鍼灸經七卷, 不著譔人名氏. 案晁公武《讀書後志》曰: "《銅人腧穴鍼灸圖》三卷, 皇朝王惟德撰. 仁宗嘗詔惟德, 考次鍼灸之法, 鑄銅人爲式. 分藏府十二經旁注ㆍ腧穴所會, 刻題其名, 倂爲圖法及主療之術, 刻板傳於世." 王應麟《玉海》曰: "天聖五年十月壬辰, 醫官院上所鑄腧穴銅人式二, 詔一置醫官院, 一置大相國寺仁濟殿. 先是, 上以鍼砭之法傳述不同, 命尙藥奉御王惟一, 考明堂氣穴ㆍ經絡之會, 鑄銅人式, 又纂集舊聞, 訂正訛謬. 爲《銅人腧穴鍼灸圖經》三卷, 至是上之, 摹印頒行. (동인침구경 7권은 편찬자의 성명을 기록하지 않았다. 살펴보건대, 남송시대 조공무의 군재독서지ㆍ후지에 말하였다. "동인수혈침구도 3권은 황조 왕유덕이 찬술한 것이다. 인종이 일찍이 왕유덕에게 조서를 내려 침구법을 고찰ㆍ편차하고 동인을 주조하여 정식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이에 오장육부의 12경락이 사방에서 흐르는 것과 수혈이 모이는 곳을 구분하고 해당 혈의 이름을 새기며, 아울러 도법과 주요 치료 방법을 기술한 뒤에 판각하여 세상에 배포했다." 남송시대 왕응린의 옥해 권63에 말하였다. "북송시대 인종 천성 5년 10월 임진일에, 주조한 두 개의 수혈동인식을 의관원에서 올리자, 조서를 내려 하나는 의관원에 두고 하나는 대상국사의 인제전에 두라고 하셨다. 이에 앞서 성상께서는 전수되어온 침폄법의 내용이 같지 않다고 여겨 상약봉어 왕유일에게 명하여 명당의 기혈과 경락이 모이는 곳을 고찰하여 동인의 형태로 주조하라고 하고, 또 이전의 학설을 수집ㆍ편찬하여 오류를 정정하라고 하시자 동인수혈침구도경 3권을 편찬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성상께 올리고 인쇄하여 천하에 배포하였다.)
<사고전서> 周密《齊東野語》曰: "嘗聞舅氏章叔恭云, 昔倅襄州日, 嘗獲試鍼銅人全像, 以精銅爲之, 腑臟無一不具, 其外腧穴則錯金書穴名於旁. 凡背面二器相合, 則渾然全身. 蓋舊都用此以試醫者. 其法外塗黃蠟, 中實以水, 俾醫工以分折寸, 案穴試鍼. 中穴則鍼入而水出, 稍差則鍼不可入矣, 亦奇巧之器也. 後趙南仲歸之內府. 叔恭嘗寫二圖, 刻梓以傳焉." 今宋銅人及章氏圖皆不傳, 惟此書存其梗槪爾. (주밀의 제동야어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찍이 외삼촌인 장숙공에게 들었는데, 옛날에 외삼촌께서 양주의 부직 관원으로 재직하다가 하루는 시침 연습을 할 수 있는 동제 인체 모형의 전신상을 얻었다고 한다. 정련한 동으로 제작한 이 전신상은 오장육부가 모두 갖춰져 있었고, 전신상 겉면의 수혈에는 옆에 해당 혈의 명칭이 상감기법의 금박으로 새겨졌다. 대개 등 부분에서 두 개의 기물이 결합하면 온전히 사람의 전신 모습이 되었다. 옛날에는 모두 이 물건을 사용해 의생들을 테스트했던 것 같다. 그 시험방법은 혈 자리의 겉면에 밀랍을 칠하고, 안쪽에는 물을 채운 다음 의생들에게 아주 세밀하게 혈 자리를 살펴 시침을 해 보게 하는 방식이었다. 선택한 혈이 정확하면 침이 들어가 물이 흘러나오고, 조금이라도 차이가 나면 침이 인체 모형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그야말로 기이하고 정교한 물건이었다. 후일 조남중이 그 물건을 황실의 창고로 보냈다. 장숙공이 일찍이 두 장의 그림을 그려 목판에 새겨 인쇄함으로써 세상에 전하였다." 현재 송대에 제작한 동제 인체 모형과 장숙공이 그린 그림은 모두 전하지 않으며, 오직 이 책에만 그 대략적인 모습이 보존되어 있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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