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20년 동안 내 안에서 자란 기억의 독침, 연극 '더 와스프' [주말엔 공연 한 잔]

김희선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3.28 10:00

수정 2026.03.28 10:00

[런던 웨스트엔드 화제의 심리 스릴러 연극 '더 와스프']
지난 8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한국 초연 개막
20년 만에 재회한 학교폭력 가해자와 피해자 이야기
무대를 꽉 채우는 두 여배우의 폭발적인 연기 대결
연극 <더 와스프> 권유리(왼쪽)와 김려원. /사진=(주)해븐프로덕션 제공
연극 <더 와스프> 권유리(왼쪽)와 김려원. /사진=(주)해븐프로덕션 제공

[파이낸셜뉴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때론 지독한 기만이다. 어떤 상처는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 깊은 곳에서 부패하며 더 치명적인 독을 품기 때문이다.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한국 초연의 막을 올린 연극 <더 와스프(THE WASP·말벌)>는 바로 그 '아물지 못한 상처'에 관한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다.

2024년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이 작품은 영국 극작가 모건 로이드 말콤의 희곡을 무대로 옮겼다. 흔치 않은 여성 2인극으로, 학교 폭력이라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진 두 여자가 20년 만에 재회하며 벌어지는 파국을 팽팽한 심리 스릴러로 그려낸다.



“내 남편을 죽여줘” 20년 만의 재회, 5만파운드의 유혹

20년이라는 긴 침묵을 깨고 어느 조용한 카페에서 두 여자가 마주 앉는다. 입은 옷부터 말투까지 공통점이라곤 없어 보이는 두 여자의 이름은 '헤더'와 '카알라'. 한때는 같은 학교를 다닌 친구였지만, 학창 시절의 얄팍한 우정조차 희미해진 두 사람의 삶은 전혀 다른 궤적을 그리며 흘러왔다.

겉보기엔 안락한 중산층의 삶을 누리지만 남편의 폭력과 불임으로 속이 텅 비어버린 헤더, 그리고 뱃속에 다섯 번째 아이를 품은 채 가난하고 거친 일상을 버텨내는 카알라. 서로 다른 삶을 사는 두 사람의 재회는 한없이 어색하고 대화는 메마르게 겉돌기만 한다. 그러나 헤더가 카알라에게 건넨 한 마디로 둘 사이의 분위기는 급변한다. 남편을 죽여주면 5만파운드를 주겠다는, 충격적인 제안이다.

그러나 이 제안은 더 큰 진실로 향하는 첫 번째 문일 뿐이다. 카알라가 헤더의 제안을 수락하고 그 집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굳게 닫혀있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과거 카알라가 헤더의 영혼에 새겼던 끔찍한 학교 폭력의 실체가 드러나고, “남편을 죽여 달라”는 극단적인 제안 뒤에 숨어있던 헤더의 진짜 목적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객석의 관객들은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

텅 빈 무대를 꽉 채운 두 여자의 치열하고 처절한 목소리

<더 와스프>의 무대는 심플하다. 첫 만남 장소인 카페는 테이블 하나, 의자 두 개만으로 표현되고 무대를 가린 커튼 뒤에는 과거의 기억을 상징하는 오브제들이 웅크리고 있다. 화려한 세트나 극적인 장치 없이도 인물들의 요동치는 심리에 온전히 집중하게 만드는 조용한 힘이 있다.

연극 <더 와스프> 이경미(왼쪽)와 정우연. /사진=(주)해븐프로덕션 제공
연극 <더 와스프> 이경미(왼쪽)와 정우연. /사진=(주)해븐프로덕션 제공

이 미니멀한 무대를 압도적인 열정으로 꽉 채우는 것은 온전히 두 배우의 몫이다. 과거의 상처를 끌어안고 치밀한 복수를 완성하려는 헤더 역의 이경미와 한지은, 김려원, 그리고 거친 본능 속에 불안을 숨긴 카알라 역의 정우연, 권유리가 그 무게를 짊어졌다. 빠른 템포로 흘러가는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두 배우가 치열하게 주고받는 감정들이 빚어내는 긴장감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무대 위를 굴러다닌다.

특히 거칠고 능동적인 카알라의 앞에서 위축된 모습을 보이던 헤더가 일변하는 순간, 그리고 과거의 기억을 모두 게워낸 헤더가 카알라에게 선택을 종용한 뒤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펼쳐지는 두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관객들을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만큼 극단적인 긴장감으로 밀어붙이는 힘 역시 탁월하다.

<더 와스프>는 복수극에서 기대할 법한 카타르시스 대신 한없는 불편함을 남긴다. 무거운 소재와 자극적인 대사들, 폭력적인 상황까지 어우러져 이 극을 ‘문제작’이라 부를 관객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결말 이후 지속되는 다소 긴 암전 속에서 관객들은 지금 본 이야기에 대해 많은 것들을 곱씹게 되리라는 점이다.

"요즘 어떤 공연이 볼 만하지?" 공연 덕후 기자가 매주 주말, 공연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눕니다.
쏟아지는 작품의 홍수 속에서 어떤 작품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관객들을 위해, 기자가 직접 보고 엄선한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당신의 주말을 채워줄 즐거운 문화생활 꿀팁, [주말엔 공연 한 잔]과 함께 하세요.

bng@fnnews.com 김희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