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도쿄=서혜진 특파원】중동 정세 급변으로 촉발된 에너지 위기가 일본 경제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 상태에 들어가면서 원유 수송이 급감하자 일본 정부는 전례 없는 수준의 대응 체계를 가동하며 '사실상의 국가 비상 상황'에 준하는 대응에 나섰다.
일본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구조적 취약성이다.
일본은 원유 수입의 약 94%를 중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대부분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과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러시아산 원유 비중이 4% 수준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이번 위기는 일본 에너지 공급망에 훨씬 직접적이고 치명적인 충격을 주고 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가장 먼저 국가 비축유 방출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이미 민간 비축 15일분에 이어 국가 비축 약 30일분을 시장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산유국이 일본에 보관 중인 공동 비축분까지 포함하면 총 50일 규모의 물량이 풀리는 셈이다.
일본은 정부·민간을 합쳐 약 250일분의 비축을 보유하고 있어 단기적으로는 8개월가량 버틸 수 있는 여력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시간을 벌기 위한 조치'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이미 공급 차질이 현실화되고 있다. 일부 제조업체는 연료 부족으로 공장 가동을 중단하거나 축소했고 식품업체의 생산 중단, 온천시설 휴업, 여객선 감편 등 생활 밀착 영역까지 영향이 확산되고 있다.
경유 조달 실패로 버스 운행 입찰이 무산되는 사례까지 등장하면서 산업·교통 전반에 걸쳐 '연쇄 충격'이 가시화되는 양상이다.
이에 정부는 전력 수급 불안에 대응하기 위해 비효율 석탄화력 발전소까지 재가동하기로 했다. 탄소 배출 감축 정책에 따라 단계적으로 폐지하기로 했던 노후 설비의 가동 제한을 풀고 1년 한시적으로 운영을 확대하는 방안이다.
이는 액화천연가스(LNG)와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전력 공급을 유지하기 위한 '긴급 처방'이다.
정부는 우회 항로 개척과 공급망 다변화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실제로 일부 물량은 홍해 등 우회 항로를 통해 일본에 도착했다.
29일 NHK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지 않는 경로로 운송된 중동산 원유가 최근 에히메현 앞바다에 도착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에 대한 군사 작전을 시작한 이후 중동을 출발한 원유가 일본에 도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유조선은 지난 1일 사우디아라비아 서부의 얀부 항에서 약 10만킬로리터의 원유를 적재한 뒤 홍해를 통과해 온 다른 유조선에서 동남아시아 말레이시아에서 환적해 운송했다. 이는 사실상 봉쇄된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지 않는 경로를 이용한 것이다.
정부와 기업들은 공급망 다변화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 남미, 캐나다, 중앙아시아 등 중동 외 지역에서 원유 조달을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지난 23일 참의원(상원) 본회의에서 "경제산업성이 민간사업자와 협력해 과거 조달 실적이 있고 증산 여력이 있는 중앙아시아·남미, 캐나다·싱가포르 등으로부터 원유 및 석유제품을 확보하는 방안을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에너지 기업 인펙스는 아제르바이잔 인근 해상에서 생산되는 원유를 자국 시장에 우선 공급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인펙스는 그룹사를 통해 아제르바이잔과 카자흐스탄의 카스피해 유전 2곳에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해당 프로젝트 전체 생산량(하루 약 78만 배럴)의 약 7~9%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
그동안 이 회사는 카스피해 유전에서 생산한 원유를 장기 계약과 현물 시장을 통해 유럽 등 해외 고객에게 판매해 왔지만 향후에는 현물 물량의 일부를 일본 수요에 따라 우선적으로 배분할 방침이다.
정부는 원유 급등에 따른 시장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위기관리 대변인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신설해 정보 일원화에 나서기도 했다.
위기관리 대변인의 공식 직함은 '위기관리·사고대응 즉응대책 총괄조정관'으로 경제산업성 산하 자원에너지청에 신설됐다. 1996년 경제산업성에 입성해 현재 산업 안전 담당 심의관을 담당하고 있는 호소카와 시게미가 지난 12일부터 겸직하고 있다.
이는 동일본 대지진이나 우크라이나 전쟁 당시에도 없던 조치로 시장 불안과 사재기 등을 차단하기 위해 정부 메시지를 통제·집중하겠다는 의도라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전했다.
실제로 정부는 석유 비축량 발표 주기를 '월 1회'에서 '매일'로 바꾸고, 가격 급등 상황에서 소비자들에게 사재기를 자제해달라고 직접 호소하는 등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밀도의 커뮤니케이션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이번 사태가 일본 에너지 정책의 근본적 한계를 드러낸 만큼 중장기 에너지 전략 재편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값싸고 안정적이라는 이유로 중동 의존도를 높여온 전략이 지정학적 리스크 앞에서 취약성을 노출했고 비축·석탄·절약이라는 '구식 대응 수단'에 다시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확인됐다고 평가했다.
업계에서는 "3~4개월 이상 봉쇄가 지속될 경우 공급 차질이 심각한 수준에 이를 것"이라는 경고도 나온다.
sjmary@fnnews.com 서혜진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