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 설비·운송 구조·장기계약·러 제재
4중 족쇄가 만든 70%의 덫
미국산 VLCC는 파나마를 못 지나고, 중형유조선은 비용↑
동남아는 원유가 없고, 중앙아시아는 바다가 없다
4중 족쇄가 만든 70%의 덫
미국산 VLCC는 파나마를 못 지나고, 중형유조선은 비용↑
동남아는 원유가 없고, 중앙아시아는 바다가 없다
[파이낸셜뉴스] 한국은 중동에 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긴장해왔다. 정부는 비축유를 얘기하면서 국민을 안심시키기 바빴고, 수입지역 다변화의 필요성이 지적돼왔다. 40년 넘게 반복되는 풍경이다. 하지만 이를 단순한 관성이나 정책 실패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가격 경쟁력, 정유설비 구조, 장기 거래 관행, 물류 효율, 그리고 한국 산업의 수출형 정제 시스템이 오랜 시간 맞물리며 만들어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정유 설비 자체가 중동산으로 설계
한국석유공사의 '2024년 국내 석유수급통계'에 따르면 중동산 원유 비중은 71.5%로, 전년(71.9%) 대비 0.4%포인트 소폭 줄었다. 사실상 제자리다. 2016년 85.2%에 달했던 수치는 미국산 셰일오일 도입 확대에 힘입어 2021년 59.5%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2022년을 기점으로 다시 반등, 이후 지금까지 70% 선에서 고착됐다.
지난해 원유 수입 상위 5개국은 사우디아라비아·미국·UAE·이라크·쿠웨이트 순이다.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4개국은 모두 중동 산유국이다. 수입액 753억 달러(약 101조 원) 중 중동 비중은 68.8%에 달한다. 이 구조를 단지 정책 의지의 부재로 설명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구조적 장벽이 4중으로 겹쳐 있다고 진단한다.
한국의 정유 설비는 중동산 '중질 고유황' 원유 처리에 최적화돼 있다. SK에너지·GS칼텍스·에쓰오일·HD현대오일뱅크 등 주요 정유사들이 수십 년에 걸쳐 두바이유 정제에 특화된 설비를 구축한 결과다.
미국산 WTI나 동남아산 경질유는 황 함량이 낮은 '경질 저유황' 원유다. 이 원유를 대규모로 들여오면 정제 효율이 뚝 떨어지고 수율·원가 구조가 흔들린다. 설비 개조는 수조 원짜리 증류탑·수소화처리 설비를 통째로 바꾸는 작업으로, 공사 기간만 수년이 걸린다.
전문가들은 이를 '설비 잠금 효과(lock-in effect)'라고 부른다. 한 번 특정 유종에 맞게 지어진 설비는 그 유종에 묶이게 되고, 이를 바꾸는 비용과 시간이 너무 커 사실상 전환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뜻이다.
중동은 가깝고 미국산은 생각보다 멀다
순수 물류 관점에서도 중동산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사우디 라스타누라 항구에서 한국 남해안 정유공장까지 해상 거리는 약 2만 5000km다. 빈 배 출항(16일) → 현지 선적(3~4일) → 귀항(21~22일), 왕복 총 약 40일이 걸린다.
미국 걸프만은 언뜻 더 가까워 보인다. 텍사스·루이지애나에서 한국까지 직선 해상 거리는 약 1만 9,000~2만 1,000km. 하지만 실제 운송은 훨씬 복잡하다. 원유 수송의 표준인 초대형 유조선(VLCC·20~30만 톤급)은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지 못한다. VLCC로 미국산을 싣고 한국에 오려면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야 하고, 항로가 약 3만 5000km로 늘어 편도만 35~40일이 걸린다. 중동(18~20일)의 두 배다.
파나마 운하를 경유하는 중형 유조선을 쓰면 편도 20~25일로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엔 비용 효율이 문제다. 한 번에 실을 수 있는 물량이 줄어 단위당 운송비가 크게 높아지고, 운하 통행료와 대기 시간도 만만치 않다. '거리는 짧지만 배도 작고 운하도 통과해야 하는' 미국산이 '거리는 멀지만 대형 선박으로 한 번에 쏟아붓는' 중동산보다 실질 운송비가 더 높아지는 역설이다.
정부가 비중동산 원유 수입 시 운송비 초과분을 리터당 최대 16원 환급해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게 연간 1700억 원을 써도 중동산의 가격 경쟁력을 완전히 상쇄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더해 원유 거래의 대부분은 수 년짜리 장기 계약으로 이뤄진다. 중동 산유국들과의 협력 관계가 오래된 만큼 계약 안정성도 높다. 러-우 전쟁 이후 에너지 불안이 커지면서 아시아 정유사들은 오히려 중동과의 계약 기간을 더 늘렸다.
2022년 이전, 한국의 중동 의존도가 60% 아래로 떨어질 수 있었던 배경엔 러시아산 원유(비중 약 5.6%)도 있었다. 러-우 전쟁 이후 서방 제재가 시행되면서 한국은 사실상 러시아산을 끊었다.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은 러시아산 도입이 불가능한 구조다. 남은 선택지는 사실상 중동 아니면 미국 정도인데, 미국산은 러-우 전쟁 이후 EU의 수요 급증으로 아시아와의 경쟁이 심화됐고 가격도 올랐다.
동남아·중앙아시아도 '그림의 떡'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동남아시아는 유력한 대안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인도네시아는 1970년대 하루 100만 배럴을 생산했지만 2022년 생산량은 64만 배럴로 줄었다. 같은 해 수요는 158만 배럴이다. 태국도 생산 33만 배럴, 수요 128만 배럴로 순수입국이다. 한국의 하루 수입 필요량(약 280만 배럴)을 감안하면 동남아 전체를 합쳐도 수요를 채우지 못한다.
유종도 문제다. 동남아산은 경질유 위주라 한국의 중질유 처리 설비와 맞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이 동남아에서 수입하는 나프타조차 중동산 원유를 정제해 만든 것이 많다. 호르무즈해협이 막히면 동남아 경유 물량까지 함께 타격을 받는 구조다.
중앙아시아 국가인 카자흐스탄은 세계 12위권 산유국이다. 텐기즈·카샤간 유전을 보유하고 2024년 하루 수출량은 143만 배럴에 달한다. 그러나 결정적 약점이 있다. 내륙국이다.
원유를 수출하려면 파이프라인으로 육상 운송한 뒤 타국 항구에서 유조선에 실어야 한다. 핵심 수출로인 카스피해 파이프라인 컨소시엄(CPC)은 러시아 영토를 가로질러 흑해 노보로시스크 항구로 이어진다. 카자흐스탄 수출의 최대 80%가 이 경로를 통한다.
2025년 말 우크라이나 드론 공격으로 CPC 터미널 일부가 파괴됐고, 카자흐스탄 석유 생산량이 일시적으로 35% 감소했다. 러시아가 파이프라인을 통제하는 한, 카자흐스탄 원유는 지정학적 인질이나 다름없다.
설령 이 경로로 도입한다 해도, 흑해→지중해→수에즈운하→인도양→한국의 복잡한 항로를 거쳐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수출량(하루 약 39만 배럴)은 한국 수요의 14%에 불과해 규모 자체도 불충분하다.
탈중동, 가능할까...쉽지 않은 조건
전문가들은 '단기는 불가능, 중장기는 가능'이라고 입을 모은다. 다만 조건이 까다롭다.
우선 정유 설비의 유종 다변화다. 미국산·서아프리카산을 혼합 처리할 수 있는 블렌딩 설비와 고도화 설비를 단계적으로 확충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비용이 크지만 에너지 안보 관점에서 투자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다음은 신흥 산유국과의 장기 계약 발굴이다. 브라질·가이아나·서아프리카(나이지리아·앙골라) 등 비(非)OPEC 지역은 최근 생산량이 늘고 있다. 정부의 비중동 원유 운송비 환급 제도를 이 방향으로 적극 활용하는 전략이 거론된다. 장기적으로는 재생에너지 확대·원전 활용·수소 도입 등 에너지 수요 구조 자체를 바꾸는 전환이 병행돼야 한다. 어떤 원유를 들여오느냐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줄이는 처방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기후·환경과 에너지는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입니다.
에너지의 생산 방식에 따라 지구온난화를 가속화하거나, 반대로 기후나 환경의 변화가 에너지 수요와 공급에 영향을 줍니다. [이유범의 에코&에너지]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인 기후·환경 및 에너지 이슈를 들고 매주 토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leeyb@fnnews.com 이유범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