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건·사고

임금체불 피해액 절반은 제조·건설업… 영세 하청에 집중 [도둑맞은 임금 2조 (下)]

서지윤 기자,

박성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4.09 18:29

수정 2026.04.09 20:52

"이 바닥이 얼마나 좁은데… "
미운털 박힐까 신고 쉽지 않아
"곧 준다"는 말 믿었다 뒤통수
하도급 구조상 법 우회한 채용
노봉법은 원청 사용자 책임 인정
"임금 지급 규정도 명확히 해야"
#. 건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20년 경력의 기능공 A씨(48)에게 지난겨울은 유독 시리고 길었다. 2025년 9월 상시근로자 3명의 영세 재하청 업체에 몸을 담았을 때만 해도 "조금만 버티자"던 사장의 말은 희망 고문이 됐다. 첫 달 월급날 통장에 찍힌 금액은 약속된 300만원의 절반뿐이었다. 사장은 "다음 달엔 무조건 채워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기일이 오자 이번엔 "6개월 뒤에 한꺼번에 줄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 건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20년 경력의 기능공 A씨(48)에게 지난겨울은 유독 시리고 길었다. 2025년 9월 상시근로자 3명의 영세 재하청 업체에 몸을 담았을 때만 해도 "조금만 버티자"던 사장의 말은 희망 고문이 됐다. 첫 달 월급날 통장에 찍힌 금액은 약속된 300만원의 절반뿐이었다. 사장은 "다음 달엔 무조건 채워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기일이 오자 이번엔 "6개월 뒤에 한꺼번에 줄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바닥 좁은 건설판에서 '체불 신고'를 했다가 낙인이라도 찍힐까 봐 벙어리 냉가슴만 앓았던 A 씨. 하지만 정작 업체는 소리 소문 없이 문을 닫았고 사장은 연락도 받지 않고 있다. 밀린 임금만 어느덧 1000만원을 훌쩍 넘겼다. 이 돈이면 밀린 집세를 내고 아이들을 다시 학원에 보낼 수도 있다. A씨는 "건설 시장에서 미운털 박힐까 봐 기다렸는데 오히려 뒤통수를 맞았다"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고용노동청 근로감독관의 처분만 기다리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9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국내에서 일한 대가를 주지 않은 금액은 2조679억원으로 집계됐다.

A씨의 사례처럼 1인당 평균 1000만원이 체불됐다고 가정하면, 약 20만명의 가장이 임금을 받지 못한 셈이다.

업종별로는 제조업과 건설업이 각각 6147억원과 4166억원으로 전체 피해액의 절반가량을 차지했다. 모두 국내 경제를 짓눌렀던 경기둔화의 직격탄을 맞은 업종이다. 실물 경제의 허리인 제조업은 글로벌 공급망 불안과 소비 위축으로 생산 지표가 곤두박질쳤다. 반도체 등 핵심 품목의 수출 부진이 장기화되면서 공장 가동률은 떨어졌고 이는 영세 협력업체들의 경영난으로 전이됐다.

건설업도 비슷했다. 가파르게 치솟은 금리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을 막았고, 건자재 가격 폭등은 중소 건설사들의 자금난을 불러왔다. A씨가 속했던 재하청 업체와 같은 한계를 버티지 못하고 도산하는 업체들도 잇따랐다.

고용노동부의 '고용행정 통계로 본 노동시장 동향'을 보면 2025년 제조업계 고용보험 가입자 수는 384만8000명으로 전년보다 1만4000명 감소하면서 7개월째 반등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건설업계 가입자 수 역시 74만7000명으로 29개월 연속 줄어들었다. 경기 불황이 고용 안정성 추락으로 확장됐다는 의미다.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다단계 재하도급 구조가 업계에 만연하다는 점도 원인 중 하나로 시장에서는 거론된다. 원청부터 하청, 재하청이 촘촘히 얽혀있는 상황에서 법을 우회하는 형식의 채용과 계약 관행이 이어졌기 때문에 임금을 지급해야 할 책임 주체가 불분명해진다는 설명이다.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개정안)은 하청 노동자에 대해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원청의 사용자 책임을 강화하는 것이 골자다.

한 하도급사에서 근무했던 건설업 종사자 B씨(56)는 "임금과 장비 임대료를 받지 못해 1억원 넘는 금액이 체불됐다"면서 "주변에 빚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채무조정 신청을 하거나 생계 수단과 다름없는 트럭을 팔아 할부를 갚고 다른 트럭을 사는 지인도 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제도 개편을 주문했다. 하은성 샛별노무사사무소 노무사는 "현행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은 확정기여형 퇴직연금의 지연이자를 지급하지 않는 경우 사업주에 대한 처벌이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퇴직금을 포함한 모든 체불임금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전문대학원 교수 또한 "하도급 구조에서 임금이 제대로 지급되도록 임금 지급 책임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조언도 있다. 업계의 경영난과 업무 중단, 회생절차 신청 등이 맞물릴 경우 이들 업종의 임금체불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는 취지다.
최기일 현장노무사사무소 노무사는 "업계가 안정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인력 구조와 임금 체계도 안정화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jyseo@fnnews.com 서지윤 박성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