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건국대 윤대진 교수팀
가뭄 대응 스위치 단백질 발견
기후위기 극복할 '슈퍼 작물' 길 열려
가뭄 대응 스위치 단백질 발견
기후위기 극복할 '슈퍼 작물' 길 열려
택배 상자를 열 때의 설렘, 기억하시나요? 대학 연구실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삶을 바꿀 놀라운 발견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다만 '논문'이라는 두꺼운 포장지에 쌓여있을 뿐이죠. '언박싱 연구실'에서는 복잡한 수식과 이론 대신, 여러분이 알고 싶은 알맹이만 쏙 골라 담겠습니다. 자, 그럼 상자를 열어볼까요? 오늘 언박싱할 주인공은 바로 이 연구입니다.
■물 부족 시대, '가뭄 타지 않는 작물' 만든다
지구 온난화로 전 세계 곳곳에서 가뭄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농작물이 말라 죽으면 식량 위기로 이어진다. 이번 연구에서 밝혀진 단백질 덩어리는 식물의 가뭄 저항력을 조절하는 핵심 스위치다. 연구팀은 "이 스위치를 적절히 조절하면 수확량은 유지하면서도 가뭄에 훨씬 강한 작물을 개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쉽게 말해, 이 연구는 미래의 '가뭄 걱정 없는 벼·밀·콩'을 만드는 설계도의 아주 중요한 조각을 찾아낸 셈이다.
■동물에게만 있던 '유전자 조절자' 식물에서도 발견
연구팀은 식물이 가뭄을 견디는 과정에서 유전자가 작동하는 방식을 조절하는 핵심 단백질을 찾는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의 출발점은 'HOS15'라는 단백질이었다. HOS15는 식물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 다른 단백질들과 하나로 뭉쳐 유전자가 작동하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연구팀은 HOS15와 함께 움직이는 단백질 목록을 분석하던 중, 'AT3G47850'이라는 미확인 단백질을 발견했다. 이 단백질은 동물의 유전자 조절에 관여하는 'GPS2'와 구조가 매우 닮아 있었는데, 식물에서는 그동안 그 정체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연구팀은 이 단백질에 'GPS2-Like', 줄여서 'GPL'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본격적인 분석에 들어갔다.
■자물쇠 풀리자 생존율 83%, 식물 생존의 비밀 풀었다
연구팀은 먼저 GPL이 HOS15, 그리고 유전자에 자물쇠를 채우는 효소(HDA6)와 실제로 한데 묶여서 활동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효모를 이용해 단백질 간의 결합을 확인하고, 특정 단백질만 낚시하듯 뽑아내 함께 붙어 있는 것들을 확인하는 실험을 거친 결과다. 이 세 단백질은 하나의 커다란 '유전자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
이 브레이크의 역할은 가뭄을 견디는 유전자들이 평소에는 숨죽이고 있게 하는 것이다. 식물 호르몬 ABA(앱시스산)는 가뭄이 왔을 때 숨구멍을 닫고 생존 유전자를 깨우는 신호다. 하지만 이 신호가 너무 강하면 식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그래서 GPL이 포함된 이 단백질 덩어리는 평소에 유전자 위에 앉아 자물쇠를 채워두고 과도한 반응이 일어나지 않게 관리한다.
반대로 실제 가뭄이 오면, GPL 단백질이 빠르게 사라지면서 채워져 있던 자물쇠가 풀린다. 그러면 가뭄 대응 유전자들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고, 식물은 숨구멍을 닫아 수분 손실을 줄이며 생존 모드로 전환된다.
연구팀이 유전자를 마음대로 교정하는 기술(CRISPR)로 GPL 단백질이 만들어지지 않게 조절한 식물은 놀라운 결과를 보였다.
14일간 물을 주지 않았을 때 정상 식물은 모두 말라 죽었지만, GPL이 제거된 식물은 83%가 살아남았다. 브레이크가 사라지니 가뭄에 대응하는 능력이 항상 최고조로 유지된 것이다.
이 차이는 유전자의 전체 활동량에서도 드러났다. 가뭄 신호가 왔을 때 정상 식물보다 GPL이 없는 식물에서 반응하는 유전자 수가 2배 이상 많았고, 특히 억제되던 유전자들이 반대로 활발하게 작동하는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가 식물과 동물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유전자 조절 시스템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냄으로써, 생명체의 진화적 연결고리를 증명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식물과학 분야 최고 권위지인 'Plant Communications'에 게재됐다.
monarch@fnnews.com 김만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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