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의 작가 이배 '앙 아땅당, 기다리며'展
작품 사이사이 걸으며 예술과 자연 경험
높이 8m·7t 대형 조각 '불로부터' 눈길
"기다림은 수동적 상태 아닌 성찰의 시간"
미래 향해 달려가는 미완성의 순간 조명
작가와의 만남·명상 등 프로그램도 운영
숯은 타고 남은 물질이지만, 작가에게 그것은 끝이 아닌 다시 시작되는 시간의 형상이다. 불을 통과한 물질이 품은 무게와 시간의 감각은 건축과 자연 사이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작품 사이사이 걸으며 예술과 자연 경험
높이 8m·7t 대형 조각 '불로부터' 눈길
"기다림은 수동적 상태 아닌 성찰의 시간"
미래 향해 달려가는 미완성의 순간 조명
작가와의 만남·명상 등 프로그램도 운영
숯이라는 물질을 매개로 자연과 인간, 시간과 존재가 교차하는 관계망을 심층적으로 조망하는 전시가 강원도 원주에서 열린다. 한솔문화재단 뮤지엄 산(SAN)은 오는 12월 6일까지 '숯의 화가'로 불리는 이배 작가의 개인전 '앙 아땅당(En attendant, 기다리며)'을 선보인다고 23일 밝혔다.
이번 전시는 스페이스(Space)·아트(Art)·네이처(Nature)라는 뮤지엄의 철학을 한국적 조형 언어로 확장하며, 본관 입구부터 야외 공간까지 전시실 전체를 하나의 유기적인 사유의 장으로 구성했다.
1989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 '숯'이라는 매체에 천착해 온 이 작가는 전시를 통해 단순한 물질적 실험을 넘어 존재와 세계를 사유하는 하나의 예술적 체계를 드러낸다. 특히 작품을 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관람객들이 공간을 이동하며 작품 사이를 걸을 때, 비로소 예술과 자연이 하나의 경험으로 완성된다.
전시 제목인 'En attendant: 기다리며'는 단순한 시간의 지연이 아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 속에서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시간, 어떤 변화가 이뤄지기 전, 생성의 작용'을 의미한다. 실체 없는 대상을 향한 수동적인 기다림을 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에너지를 응축하는 능동적인 시간을 은유한다.
숯이 만들어지는 과정 또한 기다림의 시간과 닮아 있다. 나무는 가마 속에서 불에 타며 형태를 잃지만,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식으며 새로운 물질로 재탄생한다. 이처럼 생성과 소멸, 그 사이 인고의 기다림을 통해 완성되는 변화의 시간은 이배 작업의 핵심적인 사유가 된다.
뮤지엄 본관에는 지난 2023년 미국 뉴욕 록펠러센터에서 선보인 작업의 확장된 형태로 높이 8m, 폭 5m, 무게 7t에 달하는 '불로부터(Issu du feu)'가 눈길을 끈다. 숯은 전통적으로 정화와 치유를 상징하며, 관람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자연의 순환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청조갤러리 로비의 '붓질(Brushstroke)' 시리즈 16점은 전시장을 벗어나 자연의 빛이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공간에 배치돼 거대한 붓질로 이뤄진 풍경 속을 직접 산책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계절과 날씨의 빛과 함께 작가의 수행적 행위가 결합된 작품은 마치 춤을 추듯 시시각각 변화함을 보여주게 된다.
갤러리 1, 2관은 '화이트(White)'와 '블랙(Black)'의 공간으로 나뉜다. 여기서 검정은 모든 색을 흡수하는 심연이자 가능성의 상태로, 흰색은 비어 있는 여백과 빛으로 존재하며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 3관 '비커밍'(Becoming)에서는 이 작가의 정체성인 '농부의 아들'에 주목한다. 9m 스크린의 영상과 실제 흙으로 구현된 논 설치물은 땅과 신체, 시간의 순환을 가시화한다.
논 위에서 직접 붓질하는 그의 행위를 담은 영상과 경상북도 청도 작업실의 흙을 옮겨와 구현한 설치는 이 작가의 작업이 단지 손끝의 기술이 아닌 삶의 기원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농부의 아들로 자라난 그의 신체 감각과 땅의 리듬, 자연의 순환에 대한 기억이 이 공간에서 밀도 있게 떠오르는 느낌이다.
전시의 대미는 야외 공간의 브론즈 조각 '붓질' 6점이 장식한다. 10m 규모의 조형물은 주변 산세, 건축물과 호응하며 자연과 예술이 결합된 확장된 풍경을 완성한다.
특히 실내에서 응축된 숯의 물성과 사유는 바깥으로 나오며 공기와 빛, 계절의 흐름 속에 풀려난다. 이 지점에서 전시는 자연과 건축, 조형이 서로를 비추는 확장된 감각의 장이 된다.
이 작가는 "이번 전시의 제목이자 주제인 '기다림'은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다"며 "내가 예술을 진정으로 아는지, 내가 해온 작업은 무엇인지, 더 나아가 작가란 무엇인지, 그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성찰의 과정을 나타내는 물리적 시간"이라고 전했다.
한편, 이번 전시는 회화, 조각, 설치, 영상을 아우르는 압도적 스케일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삶의 본질과 기다림의 가치를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전시 기간 중에는 작가와의 만남, 예술 명상 등 다양한 연계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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