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박정환 문화전문기자 =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직장에 취업하면 자립할 수 있다? 능력주의식의 믿음이 유효하지 않다고 진단한 책이 나왔다. 역사학자 일라이자 필비는 오늘의 불평등이 개인의 소득과 능력만이 아니라 부모의 자산과 상속 가능성에 의해 더 크게 좌우된다고 진단했다. '상속계급사회'는 교육과 주거, 결혼과 돌봄까지 삶의 주요 이정표가 가족의 부에 기대는 구조를 '상속주의'라는 개념으로 묶어 해부한다.
책은 상속을 죽음 뒤에 벌어지는 재산 이전으로만 보지 않는다. 부모가 자녀에게 제공하는 주택 구입 자금, 교육비, 생활비, 육아와 돌봄 지원, 실패 뒤에도 돌아갈 수 있는 심리적 안전망까지 모두 상속의 현재형으로 읽는다.
일라이자 필비는 역사학자답게 세대 문제를 긴 흐름 속에서 배치하면서도 자전적 고백과 인터뷰, 문화 비평을 겹쳐 놓는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가족 안에서도 꺼내기 어려운 상속 이야기를 사적 불편에 머물지 않고 사회 구조의 문제로 끌어올리는 방식이 책의 특징이다.
죽음 이후가 아닌 '현재형 상속'… '엄빠 은행'이라는 새로운 계급
저자가 겨누는 상대는 능력주의의 환상이다. 노력하면 보상받는다는 사회적 믿음 뒤에서 실제로는 가족의 부와 정보력, 세대 간 자산 이전이 더 강하게 작동한다고 본다. 상속주의는 개인의 성취를 설명하는 숨은 기준이자, 공정의 언어 뒤에 가려진 구조라는 것이다.
이 책은 베이비붐 세대의 자산 축적을 상속주의의 핵심 배경으로 든다. 전후 경제 성장과 부동산 가격 상승, 연금제도와 임금 상승의 혜택을 누린 세대가 거대한 자산을 보유하게 됐고, 그 자산이 자식 세대의 삶을 다시 나누고 있다는 분석이다. 반면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는 높은 교육 수준에도 부모 지원 없이는 자립이 어려운 구조로 밀려났다.
교육 문제도 이 흐름 안에서 다시 읽는다. 한때 계층 이동의 상징이던 고등교육은 경쟁을 통과하기 위한 기본 조건으로 축소됐고, 보호받는 아동기와 투자 대상으로서의 자녀 양육이 강화됐다. 평평한 운동장이라는 말은 현실에서 더 설득력을 잃는다.
"평평한 운동장은 없다"… 우리 시대 공정의 민낯
책의 시야는 주거와 교육에서 멈추지 않는다. 젠더와 연애, 결혼, 출산과 돌봄, 노후까지 모두 상속주의의 자장 안에서 움직인다고 본다. 특히 부모의 경제적·시간적 지원 여부가 여성의 경력과 출산, 젊은 세대의 짝 선택, 결혼 뒤 삶의 안정성까지 바꿔 놓는다고 짚는다.
그래서 상속주의는 페미니즘의 논점이기도 하다. 누가 시간을 살 수 있는가, 누가 돌봄 노동의 부담을 덜 수 있는가, 누가 삶의 중요한 결정을 더 여유 있게 내릴 수 있는가를 묻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돈의 크기만이 아니라 시간과 감정, 안전망의 분배가 함께 걸려 있다고 책은 말한다.
결론은 침묵을 깨자는 요구로 모인다. 부모의 지원을 받은 사람은 죄책감 때문에, 받지 못한 사람은 소외감 때문에 말하지 못하는 현실이 상속주의를 더 공고하게 만든다고 본다. '상속계급사회'는 상속을 한 가족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기회와 공정, 돌봄과 복지, 세대 간 책임을 둘러싼 공적 의제로 다시 묻게 하는 책이다.
△ '상속계급사회'/ 일라이자 필비 지음/ 방진이 옮김/ 돌베개/ 3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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