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무더운 여름에 어느 노인의 어린 손자가 병이 났다. 아이는 더위를 먹은 것처럼 열이 나고 구토와 설사까지 나면서 멎지 않았다. 또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번조감이 심했고 몸이 붕 뜬 듯했다. 입술은 붉었고 혀는 누런 황태가 끼어 있었다.
노인은 손주를 바로 옆집에 붙어 있는 약방에 데리고 갔다. 의원은 진맥을 해 보았다. 맥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고 손발을 만져보니 손은 팔꿈치 위까지 차고 발은 무릎 위까지 차가웠다. 언뜻 보면 심한 한증(寒症)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의원은 아이에게 발열, 번조감, 붉은 입술, 갈증 등의 증상이 있어서 단순한 한증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의원은 노인에게 "손주는 지금 몸이 차갑지만 이것은 전형적인 한증이 아닙니다. 아마도 더위를 먹은 것 같습니다. 발병 원인은 아마도 서사(暑邪)로 인한 열(熱)이 원인인 듯합니다."라고 했다. 서사(暑邪)란 일사병이나 열사병의 원인이 되는 여름철 열기를 말한다.
의원은 서늘한 약을 쓰고자 하였으나, 이미 구토와 설사로 비위가 손상된 것을 염려해서 육군자탕(六君子湯)에서 백출을 빼고 황련, 목과, 황토, 도화(稻花, 벼꽃)를 넣어서 비위(脾胃)를 안정시키고 서사(暑邪)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의원은 이렇게 처방을 해서 3일분을 달여 먹게 했다. 그러나 약이 듣지 않았다. 그래서 처방을 약간 바꿔서 다시 3일분을 처방했지만 증상은 여전했다. 손주는 팔다리가 서늘하면서도 열감과 번조증, 갈증을 더욱 심하게 느끼는 듯했다.
의원은 다른 환자도 아니고 옆집에 사는 아이를 치료하지 못해 난감해했다. 이리저리 고민도 하고 다양한 의서들을 뒤적거려 봤지만, 딱히 마땅한 처방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날도 한여름으로 붉은 태양이 하늘에 높이 떠 있어 더위가 한창이었다. 의원은 선선한 바람이라도 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약방 마당에 나가 울타리 넘어 옆집을 쳐다 보았다. 옆집 마당의 꽃과 나무의 가지와 잎이 시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며칠동안 비가 오지 않았고 날씨는 무더운 탓이었다.
그 때 옆집 노인의 손주가 힘들어 하는 모습으로 물을 길어다 꽃과 나무에 뿌리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의원은 '아차~!'하면서 무언가 떠오르는 듯했다. 손주의 병 원인을 깨달을 것이다. 의원은 '이 아이의 병의 원인은 바로 음혈(陰血)과 수기(水氣) 부족이었구나.'라고 생각했다.
의원은 "어르신? 어르신?"하면서 옆집을 향해 큰소리로 불렀다. 마당에 있던 아이는 깜짝 놀라면서 의원을 쳐다봤고, 방에 있는 노인도 밖을 내다 보았다.
의원과 노인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섰다. 노인은 "무슨 일인가?"하고 물었다. 의원은 "손주의 처방이 떠올랐습니다."라고 했다. 노인은 "갑자기 무슨 비방이라도 얻은 것인가?"하고 물었다.
의원은 노인에게 "어르신의 손주가 앞서 맥이 깊고 사지가 차가웠던 것은, 어린아이의 진기(眞氣)가 아직 충실하지 못한 데다, 구토와 설사가 잦아 진액(津液)이 갑자기 손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의서에 맥은 혈맥의 흐름이고, 비(脾)는 사지를 주관한다고 했습니다. 비가 위를 위해 진액을 운행하지 못하면 사지가 수곡(水穀)의 기를 받지 못하여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위가 돌려줄 음기가 부족하니 어찌 팔다리가 온기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노인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좋은 처방이라도 있는가?"하고 물었다. 의원은 "음혈(陰血)을 보충하는 생맥산과 수기(水氣)와 진액을 보충하는 육미지황탕을 처방하면 차도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의원은 곧바로 생맥산과 육미지황환을 합방한 생맥지황탕(生脈地黃湯) 한 제를 처방해서 달여 먹게 했다. 그랬더니 아이의 구토와 설사가 곧 멎었다. 다시 한 제를 복용하게 하니 맥이 살아나고 팔다리가 따뜻해졌으며, 마지막 한 제를 다 먹기도 전에 아이의 모든 증상이 사라졌다.
생맥산은 맥문동, 오미자, 인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름철 진액을 회생하게 하는 처방이고, 육미지황환은 소아의 신음(腎陰)이 허약해서 허열(虛熱)이 상승되는 것을 막는 처방이다.
육미지황환은 원래 소아를 위한 처방이었다. 송대의 소아과 명의 전을(錢乙)이 <소아약증직결>에서 아이들은 순양지체(純陽之體, 순전하게 양기만 있음)라고 여겨서 성장 과정에서 음액(陰液)이 상대적으로 부족해지기 쉽고, 그로 인해 허열이 나타난다고 해서 아이들의 신음을 보하고 허열을 식히기 위해 고안된 처방이다.
육미지황환은 오늘날 소아뿐만 아니라 연령과 상관없이 몸의 신음(腎陰)이 부족한 상태라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대표적인 보음제다. 오후나 밤에 열감이 있으며, 입마름, 야간 빈뇨, 야간 식은땀, 이명, 무릎이 시린 증상 등이 있을 때 적합하다. 임상에서는 비뇨생식기 질환, 당뇨병, 갱년기 증후군, 만성 피로, 노인성 난청 등에서 활용된다. 반면에 냉증이 심하고 소화불량, 설사가 잦은 경우는 적합하지 않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정행헌의안(程杏軒醫案)> 慶辛酉夏, 立翁幼孫, 傷暑發熱, 吐瀉不止, 神煩體躁, 唇赤舌黃, 口渴欲飲, 飲後即吐. 診脈沉伏, 手冷過肘, 足冷過膝, 料非寒厥. 欲投涼劑, 恐其吐瀉, 脾胃受傷, 擬用六君子湯, 除白朮加川連木瓜黃土稻花, 安脾胃, 祛暑邪. 服藥不效, 維時赤日當空, 暑氣正酷, 偶見庭前花卉, 枝葉枯萎, 童子汲水溉之. 因悟病機, 乃與生脈地黃湯一服, 吐瀉即止, 再服, 脈出肢溫, 未及旬而愈. 思前脈伏肢厥者, 乃童真未充, 吐瀉日頻, 津液頓傷, 脈乃血派, 脾主四肢, 脾不能為胃行其津液, 四肢不得稟水穀之氣故也. 六味大培真陰, 生脈保金化液, 小兒臟氣易為虛實, 是以效速. (가경 신유년 여름, 입옹의 어린 손자가 더위를 상하여 열이 나고, 구토와 설사가 멎지 않았으며, 정신이 번조하고 몸이 들떠 있었고, 입술은 붉고 혀는 누렇고, 갈증이 있어 물을 마시려 하나 마신 뒤 곧 토하였다. 맥을 보니 침복하고, 손은 팔꿈치 위까지 차며, 발은 무릎 위까지 차가웠다. 한궐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서늘한 약을 쓰고자 하였으나, 이미 구토와 설사로 비위가 손상된 것을 염려하여, 육군자탕에서 백출을 빼고 황련·목과·황토·도화를 더해 비위를 안정시키고 서사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약이 듣지 않았다. 그때 붉은 태양이 하늘에 높이 떠 있어 더위가 한창이었고, 마당의 꽃과 나무가 가지와 잎이 시들어 있는 것을 보고 아이가 물을 길어다 뿌리는 장면을 우연히 보았다. 이로 인해 병기를 깨달아, 생맥지황탕을 한 제 쓰니 구토와 설사가 곧 멎었다. 다시 복용하니 맥이 살아나고 사지가 따뜻해졌으며, 열흘이 채 되지 않아 나았다. 앞서 맥이 잠복하고 사지가 차가웠던 것은, 어린아이의 진기가 아직 충실하지 못한 데다, 구토와 설사가 잦아 진액이 갑자기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맥은 혈맥의 흐름이고, 비는 사지를 주관한다. 비가 위를 위해 진액을 운행하지 못하면 사지가 수곡의 기를 받지 못하여 차게 되는 것이다. 육미는 진음을 크게 배양하고, 생맥은 금을 보하여 진액을 화생하게 한다. 소아는 장부의 기가 허실로 쉽게 변하므로, 이에 효과가 빠르게 나타난 것이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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