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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기록 1만4673건 어디에 남길 것인가… 300억원 아카이브 기록관 첫발

정용복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5.06 15:57

수정 2026.05.06 15:57

세계기록유산 등재 후 기록 인프라 시동
국비 2억원으로 기본계획 용역 착수
부지 선정·운영 방식 본격 검토
도서관·기록관·박물관 결합형 추진
2030년 준공 목표… 도민 의견 수렴

제주4·3 기록물 가운데 수형인이 가족에게 보낸 옥중 엽서. 제주4·3 관련 기록물 1만4673건은 지난해 4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제주4·3 기록물 가운데 수형인이 가족에게 보낸 옥중 엽서. 제주4·3 관련 기록물 1만4673건은 지난해 4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파이낸셜뉴스 제주=정용복 기자】 제주4·3의 기억을 흩어진 증언과 자료로 남겨둘지, 누구나 확인하고 배우는 공적 기록 인프라로 만들지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오른 4·3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교육·연구·전시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제주4·3아카이브 기록관 건립 사업이 첫 단계에 들어갔다.

6일 제주특별자치도에 따르면 제주4·3 관련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보존·활용하기 위한 '제주4·3아카이브 기록관' 건립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용역이 추진된다. 이 사업은 지난해 8월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의 '제주 7대 공약 15번 과제'로 반영됐다. 총사업비는 300억원 규모다.



이번 용역에는 국비 2억원이 투입된다. 용역 입찰은 오는 5월 8일까지 참가 등록과 제안서 제출을 거쳐 진행된다. 제주도는 제안서 평가를 거쳐 계약을 체결하고 기록관의 기본 구상, 건립 부지 선정, 운영 방향, 행정절차 이행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기록관 건립은 4·3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이후 더 큰 의미를 갖는다. 4·3 기록물은 지난해 4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등재 기록물은 모두 1만4673건이다.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와 옥중 엽서 27건, 희생자와 유족 증언 1만4601건, 시민사회 진상규명 운동 기록 42건, 정부 공식 진상조사보고서 3건 등이 포함됐다.

■ 기록은 보존을 넘어 검증의 기반

2025년 7월 18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위패봉안실에서 4·3영령들에게 4·3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음을 알리는 봉헌식이 진행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는 300억원 규모의 제주4·3아카이브 기록관 건립을 위해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용역에 착수한다. 기록관은 보존·전시·교육·연구 기능을 결합한 라키비움 형태로 검토된다. /사진=뉴스1
2025년 7월 18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위패봉안실에서 4·3영령들에게 4·3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음을 알리는 봉헌식이 진행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는 300억원 규모의 제주4·3아카이브 기록관 건립을 위해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용역에 착수한다. 기록관은 보존·전시·교육·연구 기능을 결합한 라키비움 형태로 검토된다. /사진=뉴스1


4·3 아카이브 기록관은 자료를 보관하는 창고가 아니다. 국가폭력과 민간인 희생, 진상규명, 명예회복, 화해와 상생의 과정을 기록으로 검증하고 다음 세대가 배울 수 있게 하는 공적 장치다. 역사적 사건은 시간이 흐를수록 목격자가 줄고 증언은 흩어진다. 기록이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않으면 기억은 개인의 경험에 머문다. 역사 왜곡에 대응할 근거도 약해진다.

4·3은 오랜 침묵과 왜곡을 거쳐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와 대통령 사과, 희생자 명예회복 절차로 이어진 사건이다. 그 과정에서 증언과 문서, 사진, 수형인 자료, 시민사회 활동 기록은 진실규명의 핵심 근거가 됐다. 아카이브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록은 추모의 대상이면서 사실 확인의 기반이다.

제주도가 추진하는 기록관은 도서관·기록관·박물관 기능을 결합한 라키비움 형태로 검토된다. 라키비움은 도서관과 기록관, 박물관을 합친 복합 문화·기록 공간이다. 기록물을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민이 열람하고, 연구자가 분석하며, 학생과 관람객이 전시와 교육을 통해 이해하도록 설계하는 방식이다.

제주4·3 기록관이 라키비움 형태로 지어지면 4·3 자료는 행정 보관물에서 공공 지식 자원으로 확장된다. 유족 증언은 교육 콘텐츠가 되고, 수형인 명부와 옥중 엽서는 법적·인권적 의미를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시민사회의 진상규명 운동 기록은 민주주의와 지역 공동체의 회복 과정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 2030년 준공 목표… 부지·운영 방식이 관건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묘역. 제주4·3 기록관 건립 사업은 2030년 준공을 목표로 추진된다. 제주도는 용역 과정에서 전문가와 4·3유족, 관련단체, 시민단체 의견을 수렴할 계획이다. /사진=뉴시스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묘역. 제주4·3 기록관 건립 사업은 2030년 준공을 목표로 추진된다. 제주도는 용역 과정에서 전문가와 4·3유족, 관련단체, 시민단체 의견을 수렴할 계획이다. /사진=뉴시스


이번 용역의 핵심은 건물을 어디에 세울지에만 있지 않다. 기록관을 어떻게 운영할지가 더 중요한 과제다. 부지 선정과 건축 규모도 중요하지만 기록의 수집·분류·보존·공개 원칙을 함께 정해야 한다. 디지털 아카이브와 오프라인 기록관을 어떻게 연결할지, 원본 자료 보존과 대중 열람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지도 과제다.

제주도는 용역 결과를 토대로 중앙부처 협의와 사전 행정절차를 이행하고 실시설계를 거쳐 착공할 계획이다. 목표 준공 시점은 2030년이다. 300억원 규모 사업인 만큼 중앙정부 예산 반영, 부지 확정, 운영 인력 확보, 기록물 관리 기준 마련이 단계별 과제로 남는다.

앞서 제주도는 지난해 9월 기록관 건립을 위한 전문가 토론회를 열었다. 앞으로 용역 과정에서 전문가와 4·3유족, 관련단체, 시민단체 의견을 듣는 사업설명회와 공청회도 추진할 계획이다. 기록관이 행정 주도 시설에 머물지 않으려면 유족과 연구자, 시민사회가 운영 방향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

특히 유족 증언 자료는 보존과 공개 기준을 세심하게 다뤄야 한다. 증언은 역사적 가치가 크지만 개인의 고통과 가족사가 함께 담긴 자료다. 공개 범위와 열람 절차, 개인정보 보호, 연구 활용 기준을 명확히 해야 기록관의 공공성과 인권 감수성을 함께 지킬 수 있다.

■ 세계기록유산 이후 과제는 '활용'

제78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이 4월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봉행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후 처음 열린 이날 추념식에는 생존희생자와 유족, 도민, 국민 등 2만여명이 참석했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제78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이 4월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봉행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후 처음 열린 이날 추념식에는 생존희생자와 유족, 도민, 국민 등 2만여명이 참석했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끝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세계가 가치를 인정한 기록을 어떻게 보존하고 활용할지가 다음 과제다. 기록관은 4·3을 제주 안의 기억에서 국내외 시민이 배우는 평화·인권 교육 자원으로 넓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

교육 기능도 중요하다. 4·3은 사건의 연표만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마을 공동체의 붕괴와 회복, 가족의 상처, 국가권력의 책임, 시민사회의 진실규명 노력까지 함께 봐야 한다. 기록관이 전시와 교육, 연구를 결합하면 학생과 시민이 4·3을 추상적 비극이 아니라 구체적 사람과 문서, 증언으로 만날 수 있다.

문화자원으로서의 가능성도 있다.
4·3 기록은 관광 상품으로 소비될 대상이 아니라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전달하는 공공 자산이다. 제주를 찾는 방문객이 자연 경관만 보고 떠나지 않고 제주 현대사의 깊이를 함께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도 할 수 있다.


김인영 제주도 특별자치행정국장은 "이번 용역은 4·3아카이브 기록관 건립의 기초 작업"이라며 "전문가와 도민 의견을 반영해 4·3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세계에 알리는 기반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jyb@fnnews.com 정용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