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애 키우느라 돈 쓸 데 많지? 우린 괜찮다"… 봉투 쥐고 ATM기 앞 망설이는 짠한 밤 [어른의 오답노트]

전상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5.07 20:00

수정 2026.05.07 21:12

-내 자식 장난감은 망설임 없이 카드로 긁어놓고, 부모님의 어버이날 용돈 앞에서는 계산기 두드리는 4050 '샌드위치 가장'들의 뼈아픈 자책감.
-얇아진 봉투 쥐고 자책하는 아들의 굽은 등을 가만히 토닥이는, 세상에서 가장 먹먹하고 거대한 부모의 내리사랑.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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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뉴스] 5월 7일 목요일 밤 9시. 퇴근길, 아파트 단지 상가 ATM(현금자동입출금기) 앞에 선 4050 가장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칫한다. 화면에 뜬 잔액을 확인하고 출금 금액을 입력하려는 순간, 마음속 계산기가 분주하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불과 이틀 전 어린이날, 7살 아들에게 사준 꽤 값비싼 장난감과 외식비 카드 결제 문자가 뇌리를 스친다.

"내일이 어버이날인데, 양가 부모님께 얼마씩 드려야 이번 달 마이너스를 면할까."
◇ 내리사랑은 할부로 긁고, 치사랑은 계산기를 두드린다

자식 입에 들어가는 것, 자식 발에 신기는 것은 고민 없이 할부를 끊어대면서, 왜 늙으신 부모님께 드릴 봉투 두께 앞에서는 이토록 쩨쩨해지는 걸까. 한숨과 함께 지독한 자책감이 밀려온다.

얼마 전 안부 전화에서 어머니가 지나가듯 한 말이 떠올라 가슴을 후벼 판다.



"애 키우고 학원 보내느라 돈 쓸 데 천지지? 우리는 진짜 괜찮으니까, 선물같은 것 신경 쓰지 말고 애 맛있는 거나 사 먹여라."

그 뻔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척, 봉투를 조금 얇게 타협하려는 스스로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5월 7일 밤이다.

◇ 통계가 말해주는 '샌드위치 가장'의 서글픈 현주소

위로는 늙어가는 부모의 의료비와 노후를 챙겨야 하고, 아래로는 자식의 교육비와 양육비를 감당해야 하는 이중고. 사회학과 경제학에서는 이들을 '샌드위치 세대'라 부른다.

실제로 보험연구원의 '중년층의 이중부양 부담' 보고서에 따르면, 4050세대의 절반 이상이 노부모와 미성년 자녀를 동시에 부양하며 극심한 경제적, 심리적 압박을 겪고 있다. 굳게 믿고 기다리는 미국 빅테크 주식들은 아직 속 시원한 수익을 내어주지 않아 계좌는 늘 팍팍하다.

건강을 핑계 삼아 평소 즐기던 커피와 탄산음료마저 독하게 끊고 밍밍한 생수로 속을 달래며 생활비를 아껴보지만, 정작 내 부모님을 위한 예산을 떼어놓기엔 삶의 여백이 너무도 부족하다.

◇ 당신이 당신의 아이를 사랑하듯… 봉투 두께마저 품어 안는 맹목적인 내리사랑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제작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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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ATM기에서 타협한 현금을 뽑아 봉투에 담는다. 비록 부모님을 해외 온천 여행 보내드릴 만큼 두둑하지는 못할지라도, 이 봉투 안에는 위아래로 가족의 생계를 지탱하느라 자신을 깎아내린 대한민국 가장들의 피땀 어린 헌신이 들어 있다. 부모님 역시 그 봉투의 두께가 아니라, 봉투를 준비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자식의 고단한 어깨를 먼저 읽어내실 것이다.

내 새끼의 환한 웃음과 늙은 부모의 주름진 미소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며 기어코 5월의 청구서를 맨몸으로 막아내는 당신. 오늘 밤, 얇은 봉투에 대한 자책감은 이제 그만 내려놓아도 좋다.

부모님은 팍팍한 세상을 묵묵히 버텨내고 있는 당신의 고단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또 다 이해하신다.
부모님도 당신을 그렇게 키워오셨다.

뙤약볕 아래서 아들의 서툰 패스를 받아주며 당신이 세상을 다 가진 듯 뭉클했듯, 부모님에겐 지친 어깨를 하고서라도 잊지 않고 찾아온 당신의 얼굴을 보는 것 자체가 이미 넘치는 행복이다.


당신이 당신의 아이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끔찍하게 사랑하듯, 주름진 부모님의 눈에 당신은 백발이 성성해도 여전히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애틋한 아들이니까.

봉투가 조금 얇으면 어떤가. 혹은 아무것도 드리지 못하면 어떤 가.거친 세상 속에서 가족을 지켜내며 단단하게 살아내고 있는 그 존재 자체로, 당신은 이미 늙은 부모에게 가장 완벽하고 눈부신 어버이날 선물이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