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영유 졸업하면 끝난 줄 알았지?"… '최소 월 200' 초등 방과후 뺑뺑이의 서막 [얼마면 돼]

전상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5.10 15:38

수정 2026.05.10 15:38

"영어유치원 졸업하면 돈 굳을 줄 알았지?"… 더 가혹해진 초등 1학년 청구서
초등 사교육비 총액만 13조 2,000억 원 시대… 참여율 87%가 증명하는 '학원 릴레이'.
낮 1시 하교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학원 버스 탑승기, "끊으면 도태된다"는 불안감.

사진은 하교 중인 서울 시내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뉴시스
사진은 하교 중인 서울 시내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뉴시스

[파이낸셜뉴스] 평화로운 주말 오후, 40대 직장인 H씨는 동네 놀이터에서 7살 아들과 축구공을 주고받고 있다.

아들의 인사이드 패스 폼을 직접 교정해주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낸 H씨. 예전 같았으면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탄산음료를 단숨에 들이켰겠지만, 요즘 그는 푼돈이라도 아끼려 커피를 독하게 끊고 저렴한 편의점 배즙으로 갈증을 달랜다.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들. 그동안 등골을 휘게 했던 '월 200만 원'짜리 영어유치원(영유)도 이제 끝이 보인다는 생각에 내심 안도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아내가 식탁 위에 올려놓은 '초등 1학년 방과 후 시간표' 파일을 본 H씨의 동공은 거칠게 흔들렸다.

"여보, 초등학교는 낮 1시면 끝나는 거 알지? 영유 수준 유지할 '어학원'에 사고력 수학, 피아노, 그리고 당신이 시키고 싶어 하는 엘리트 축구 클럽까지 버스 시간 맞춰서 돌리려면 한 달에 최소 200만 원은 족히 잡아야 해."

영유만 끝나면 숨통이 트일 줄 알았건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더 잔인하고 정교해진 '초등 학원 뺑뺑이'의 서막이었다.



충격에 빠진 H씨는 조용히 화장실로 들어가, 자신의 유일한 구명줄인 미국 주식 계좌의 혁신 기술주 수익률을 보며 째깍거리는 '가장의 은퇴 시계'를 애써 늦춰본다.

◇ "고등학생보다 돈 더 든다"… 13조 원 쏟아붓는 초등 사교육 시장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만든 이미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만든 이미지

H씨가 마주한 '월 200만 원'의 청구서는 강남 극성 부모들의 판타지 소설이 아니다.

대한민국 3040 부모들이 온몸으로 부딪히고 있는 현실을 숫자가 명백히 증명한다.

교육부가 발표한 '2024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사교육비 총액은 29조 2000억 원으로 전년 대비 7.7% 증가했다. 이 거대한 사교육 시장의 물주는 대입을 앞둔 고등학생이 아니라 다름 아닌 '초등학생'이다.

학교급별 사교육비 총액을 보면 초등학교가 13조 2000억 원으로 고등학교(8조 1000억 원)와 중학교(7조 8000억 원)를 가볍게 압도하며 1위를 차지했다.

초등학교의 사교육 참여율은 87.7%에 달한다. 10명 중 9명의 초등학생이 학교 밖으로 나오는 순간 학원 버스에 몸을 싣는다는 뜻이다.

정부 평균치에 잡힌 금액은 수십만 원 선이지만, 예체능이나 실기 입시를 준비하는 경우 방학 기간 동안 하루 11시간 이상 학원에 머물며 실제 지출되는 사교육비가 월 300만 원에 육박하는 등 현장 체감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영유를 졸업한 아이들의 영어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어학원 심화 과정'에, 선행 학습, 예체능까지 얹으면 200만원을 넘어서 300만 원도 결코 과장된 숫자가 아니다.

◇ 낮 1시 하교의 공포, 그리고 '비교 지옥'의 인질들

서울 양천구 목동 학원가 모습.뉴스1
서울 양천구 목동 학원가 모습.뉴스1

부모들이 허영심에 미쳐서 이 엄청난 돈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다. 이 기형적인 '초등 방과 후 뺑뺑이'의 근본적인 원인은 '돌봄의 공백'과 '사교육의 불안 마케팅'이 빚어낸 구조적 비극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하교 시간은 보통 오후 1시 남짓이다. 맞벌이 부부에게 이때부터 퇴근 시간까지의 5~6시간은 지옥과도 같다. 돌봄 교실은 추첨에서 떨어지기 일쑤고, 결국 아이의 안전과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촘촘하게 짜인 '학원 버스 릴레이'뿐이다. 영수 학원으로 시작해 피아노, 미술, 태권도 학원 버스로 아이를 패스해야만 비로소 부모의 퇴근 시간과 맞물린다.

여기에 영유 출신 부모들의 딜레마가 부채질을 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여기서 영어의 맥을 끊으면, 유치원 3년 동안 쏟아부은 수천만 원이 허공으로 날아간다"는 학원 관계자의 한마디는 부모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결국 동네 놀이터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은 제 몸집만 한 책가방을 메고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학원을 전전하게 된다.

◇ 노후 자금을 긁어 아이의 '오늘'에 베팅하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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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잔인한 릴레이의 비용을 최전선에서 감당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모든 일상을 깎아내며 살아가는 40대 가장들의 몫이다.

최소 월 200만 원에서 최대 300만원 이상이라는 폭력적인 교육 물가 앞에서, 아빠들은 나스닥 ETF 차트를 밤새 들여다보며 자신의 노후 자금을 박박 긁어 아이의 오늘에 베팅한다.


"내 애가 출발선에서부터 남들에게 뒤처져 기죽는 꼴은 도저히 못 본다"는 부모의 애틋한 책임감을, 이 사회의 인플레이션과 사교육 시장은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있다. 아이가 자랄수록 청구서의 '0'은 늘어나고, 한때 자신의 꿈을 좇았던 가장의 '은퇴 시계'는 기약 없이 뒤로 밀려난다.


밤 9시, 학원 버스에서 내려 피곤한 눈을 비비며 터덜터덜 걸어오는 7살 아들을 번쩍 안아 든 H씨. 아들의 가벼운 몸무게와는 대조적으로, 그가 짊어져야 할 '초등 학원비'의 무게는 대한민국 그 어느 경제 지표보다 서늘하고 잔인하게 3040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