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의 환호와 어버이날의 눈물을 맨몸으로 받아낸 뒤, 텅 빈 지갑과 방전된 몸을 이끌고 다시 무채색의 일상으로 걸어 들어가는 대한민국 가장들의 고독한 월요일 밤.
[파이낸셜뉴스] 5월 11일 월요일 밤 10시. 폭풍 같았던 5월의 첫 열흘이 지나갔다.
어린이날에는 7살 아들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전능하고 다정한 슈퍼맨이 되었고, 어버이날에는 늙으신 부모님 앞에서 여전히 든든하고 번듯한 아들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하지만 화려했던 '1인 2역'의 영웅 놀이는 끝났다. 다시 출근길 지옥철에 몸을 싣고 무미건조한 사무실의 부속품으로 돌아온 오늘, 퇴근 후 거실 소파에 쓰러진 4050 가장을 반기는 것은 아찔한 현실상의 청구서들 뿐이다.
◇ 영광의 상처로 남은 카드 결제일과 파란 주식 창
스마트폰 화면을 열자 지난 일주일간 긁어댄 카드 결제 내역이 줄줄이 찍혀 있다.
비싼 장난감, 테마파크 입장료, 외식비, 그리고 부모님께 쥐여드린 현금 봉투까지. 가족의 웃음을 사기 위해 기꺼이 치른 '기회비용'이지만, 막상 결제일이 다가오니 목줄이 타들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생계형 가장의 본능이다.
답답한 마음에 습관처럼 열어본 미국 주식 앱은 오늘도 파란색 투성이다.
빅테크 혁신 기업들이 언젠가 내 노후를 구원해 줄 거라 굳게 믿고 묻어뒀건만, 반도체만 갈뿐 빅테크들은 도무지 갈 생각 조차 안한다. 당장 이번 달 펑크 난 카드값을 메워주기엔 아직 갈 길이 많이 멀어 보인다.
육체적인 방전도 한계에 달했다. 주말 내내 뙤약볕 아래서 7살 아들과 놀이동산에 가서 땀을 쏟은 후유증에 무릎과 발목이 비명을 지른다.
마음 같아서는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지만, 내 맘대로 안 되는 몸뚱이 탓에 그마저도 독하게 끊어냈다.
그저 냉장고에서 생수 한병 꺼내 마시며 욱신거리는 다리를 주무를 뿐이다.
◇ 축제 뒤에 찾아오는 '포스트 홀리데이 블루'
심리학에서는 큰 행사나 명절을 치른 뒤 찾아오는 급격한 무력감과 공허함을 '포스트 홀리데이 블루(Post-holiday Blues)'라 부른다.
아내 역시 밀린 학원 숙제와 교육 일정을 다시 챙기느라 지쳐 쓰러진 밤.
부부가 완벽한 태그매치를 이뤄 아이의 동화 같은 5월을 지켜냈지만, 모든 에너지를 가족에게 120% 쏟아붓고 난 뒤 정작 가장 자신의 내면은 텅 비어버린 듯한 헛헛함이 밀려온다.
영웅의 망토를 벗고 나니, 그저 내일 아침 출근을 걱정해야 하는 피곤한 중년 남성만 덩그러니 남은 기분이다.
◇ 텅 빈 지갑이 증명하는 가장 위대한 흑자
하지만 소파에 파묻혀 한숨을 쉬고 있는 당신, 오늘 밤만큼은 스스로를 너무 초라하게 여기지 말자.
당신의 지갑은 비록 홀쭉해졌을지언정, 그 대가로 아이의 맑은 눈망울에는 평생 잊지 못할 마법 같은 하루를 채워 넣었다.주식 계좌의 수익률은 마이너스일지 몰라도, 주말 내내 아빠와 땀 흘리며 훌쩍 자란 아이의 웃음은 그 어떤 우량주보다 확실한 '인생의 흑자'다.
가족이라는 거대한 우주를 지탱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통장 잔고와 체력을 바닥낸 대한민국 모든 4050 가장들. 무거운 카드값의 압박도, 욱신거리는 관절의 통증도 모두 당신이 가족의 평화를 완벽하게 지켜냈다는 영광스러운 훈장이다.
고독하고 씁쓸한 월요일 밤, 조용히 스스로에게 위로의 건배를 건네보자. 영웅 놀이는 끝났어도, 당신은 영원히 이 집안의 가장 위대한 영웅이니까.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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