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과학 과학

냄새나는 액체 없이 '쇠구슬'로 뚝딱… 다 쓴 뒤엔 레고처럼 분해하는 플라스틱 [언박싱 연구실]

김만기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5.12 05:56

수정 2026.05.12 05:56

<36> 연세대학교 화학과 김병수 교수팀
환경 오염 없는 차세대 플라스틱 제조법 개발
쇠구슬 충격으로 합성하고, 필요할 땐 다시 원재료로

택배 상자를 열 때의 설렘, 기억하시나요? 대학 연구실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삶을 바꿀 놀라운 발견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다만 '논문'이라는 두꺼운 포장지에 쌓여있을 뿐이죠. '언박싱 연구실'에서는 복잡한 수식과 이론 대신, 여러분이 알고 싶은 알맹이만 쏙 골라 담겠습니다. 자, 그럼 상자를 열어볼까요? 오늘 언박싱할 주인공은 바로 이 연구입니다.
쇠구슬이 담긴 용기가 빠르게 흔들리며 화학 반응을 일으키고, 가운데에서는 플라스틱이 형성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오른쪽에서는 형성된 플라스틱이 다시 분해돼 원료로 되돌아가는 순환 구조가 직관적으로 표현돼 있다. (그래픽=챗GPT 생성)
쇠구슬이 담긴 용기가 빠르게 흔들리며 화학 반응을 일으키고, 가운데에서는 플라스틱이 형성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오른쪽에서는 형성된 플라스틱이 다시 분해돼 원료로 되돌아가는 순환 구조가 직관적으로 표현돼 있다. (그래픽=챗GPT 생성)
[파이낸셜뉴스] 쇠구슬을 담은 통을 빠르게 흔들어 발생하는 기계적 힘만으로, 환경을 오염시키는 액체 용매 없이 플라스틱을 정밀하게 만드는 기술을 개발했다. 또한 플라스틱의 분자 구조에 달린 곁가지의 크기에 따라 힘을 받을 때 부서지는 방식이 달라지며, 특정 구조에서는 원래의 원재료 상태로 되돌아가는 재활용의 가능성도 함께 밝혔다.



이 연구는 연세대학교 화학과 김병수 교수 연구팀(제1저자 연세대 권경진·차순혁, 한양대 임다니엘)이 수행했으며, 세계적인 과학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에 게재됐다.

■ 환경과 성능 다 잡은 '지속가능한 화학'의 미래

이번 연구는 유해한 유기용매 사용을 대폭 줄인 정밀 플라스틱 합성 기술로 이어질 수 있다. 분자의 길이와 구조를 머리카락 굵기의 수만 분의 1 수준까지 정밀하게 조절해야 하는 전자소재, 특수 코팅제, 의료용 소재 분야에서 친환경 제조 기술로 응용될 가능성이 크다. 나아가 플라스틱 구조 설계만으로 분해 경로를 조절해 기계적 자극만으로 원료를 회수하는 '순환형 소재', 즉 쓰고 나서 다시 원료로 되돌릴 수 있는 소재 개발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 쇠구슬이 만드는 '청정 플라스틱', 용액보다 빠르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플라스틱이나 고성능 소재를 만들 때는 보통 '유기용매'라는 특수한 액체에 원료를 녹여 반응시킨다. 유기용매란 쉽게 말해 아세톤이나 시너처럼 특유의 냄새가 나는 화학 액체다. 이 용매들은 대부분 석유에서 만들어지며, 증발하면서 공기를 오염시키거나 건강에 해로운 영향을 줄 수 있다.

김병수 교수팀은 이 고정관념을 깼다. 액체 대신 '쇠구슬'을 선택한 것이다. 스테인리스 재질의 통 안에 원료와 쇠구슬을 넣고 1분에 30번 빠르게 흔들면, 구슬끼리 부딪히면서 강력한 에너지가 발생한다. 이 기계적인 힘이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엔진 역할을 한다.

연구팀은 플라스틱을 이루는 기본 단위인 원료('단량체'라고 부른다)를 네 종류 직접 설계·합성해 실험했다. 네 가지 원료는 모두 탄소 원자들이 육각형으로 연결된 고리 모양의 구조('방향족 고리')를 가지고 있는데, 고리의 크기만 서로 다르게 만들었다. 고리가 크면 원료 분자도 그만큼 부피가 커지고, 플라스틱에 달리는 곁가지도 커진다. 이렇게 크기를 달리한 이유는 곁가지의 크기가 플라스틱이 만들어지는 속도와 나중에 힘을 받아 부서지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체계적으로 비교하기 위해서다. 실험 결과, 이 쇠구슬 방식은 기존 액체 용매에 녹여 반응시킬 때보다 플라스틱이 만들어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친환경적이면서도 효율까지 뛰어난 것이다.

■ 레고 블록 구조가 결정하는 '분해의 비밀'

연구팀은 만들어진 플라스틱이 힘을 받을 때 어디서 어떻게 끊어지는지도 면밀히 추적했다. 분해된 조각들의 무게를 아주 정밀하게 측정하는 특수 질량분석 장비(MALDI-ToF)로 어떤 조각이 생겼는지 확인하고, 컴퓨터 시뮬레이션(CoGEF)으로 힘이 플라스틱의 어느 부위에 집중되는지 계산했다.

분석 결과, 플라스틱 뼈대에 붙은 곁가지가 클수록 기계적 힘이 뼈대 대신 곁가지 쪽에 집중돼 곁가지가 먼저 끊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로 곁가지가 작은 경우에는 힘이 뼈대까지 전달돼 주사슬, 즉 플라스틱의 중심 기둥이 끊어졌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특정 구조의 플라스틱에서 나타난 '해중합' 현상이다.
해중합이란 플라스틱이 단순히 잘게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조립된 레고를 하나씩 떼어내듯 처음의 원재료 상태로 고스란히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다 쓴 플라스틱에 기계적 힘을 가해 새것과 다름없는 원료를 회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연구를 이끈 김병수 교수는 "기계적인 힘을 이용해 용매 없이 정밀한 고분자를 만들고, 나아가 구조에 따라 어떻게 분해되는지 그 경로를 밝혀낸 것이 이번 연구의 핵심"이라며, "이 기술이 실용화된다면 향후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환경 오염을 줄이면서도 재활용이 쉬운 지속가능한 소재를 설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monarch@fnnews.com 김만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