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등기부등본엔 내 이름, 연금 계좌는 0원"… 영끌의 싸늘한 청구서
통계청 발표, 중도인출 82%가 주거비… 1.8조 헐어 쓴 40대 '노후 최후 보루' 붕괴
가족 보금자리 지키려 복리의 마법 포기한 가장들, 멈춰버린 '은퇴 시계'
[파이낸셜뉴스] "여보, 김 부장네는 이번에 명퇴하면서 퇴직금으로 작은 상가 알아본다는데. 당신은 지금 퇴직금 계좌에 얼마나 쌓였어?"
일요일 밤 10시. 주말의 끝자락에서 내일의 출근 압박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시간. 무심코 던진 아내의 질문에 40대 가장 A씨는 들고 있던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스마트폰으로 남몰래 확인해 본 퇴직연금(IRP) 앱의 잔고는 초라하다 못해 투명한 수준이다.
당연한 결과다. 불과 몇 년 전 무섭게 치솟는 집값과 전세금에 쫓길 때, '내 집 마련'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노후 최후의 보루인 퇴직금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중간정산(중도인출)을 받아버렸기 때문이다.
월요일 아침 무거운 발걸음을 떼야 하는 대한민국 40대 가장들의 뒤통수가 유독 서늘한 이유는, 이처럼 '집 한 채'와 맞바꾼 텅 빈 퇴직금 계좌에 있다.
■ 통계가 증명한 엑소더스… 노후 자금 82%가 '콘크리트' 속으로
A씨만의 유난스러운 사연이 아니다. 대한민국 중산층 가구의 노후 자금은 지금 거대한 아파트 콘크리트 속에 갇혀 빈사 상태다.
숫자는 현실의 참혹함을 가장 투명하게 보여준다. 최근 통계청과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퇴직연금통계'를 들여다보면 상황은 노골적이다.
작년 한 해 동안 주택 구입을 목적으로 퇴직연금을 중도 인출한 인원은 3만 8000명, 인출 금액은 무려 1조 8000억 원에 달했다. 관련 통계가 작성된 이래 역대 최고치다.
전체 중도 인출 사유를 분석해보면 '주택 구입'(56.5%)과 '주거 임차'(25.5%)가 무려 82%를 차지했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등 강력한 대출 규제로 은행의 문턱이 높아지자, 자금 조달에 한계를 느낀 30~40대 가장들이 노후 생활비의 최후 방어선마저 허물어 부동산에 쏟아부은 뼈아픈 결과다.
■ "복리의 마법을 걷어찼다"… 전문가들의 뼈대리는 경고
"집 한 채 건졌으니 든든한 것 아니냐"고 자위할지 모른다. 하지만 재무적 관점에서 퇴직연금의 중도 인출은 미래의 생존권을 현재의 안락함과 맞바꾼 가장 값비싼 타협이다.
대형 증권사의 연금 컨설팅 관련 전문가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퇴직연금을 깨서 주택을 구입한 것은 단순히 5000만 원, 1억 원이라는 뭉칫돈을 미리 당겨 쓴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 돈이 미국 S&P500 등 우량 자산에 장기 투자되어 은퇴 시점까지 15년간 만들어낼 수 있었던 '복리의 마법'과 엄청난 '기회비용'을 통째로 날려버린 것"이라고 단언했다.
자산의 80%가 부동산에 묶여 매달 손에 쥘 현금이 없는 이른바 '흑자 부도'의 서막이다.
아파트 평수는 넓어졌고 등기부등본엔 선명한 내 이름이 찍혀 있지만, 정작 은퇴 후 병원비나 생활비를 감당할 현금 흐름은 완벽하게 말라붙은 '하우스 푸어'의 민낯이다.
■ 자책할 시간조차 없다… 가장의 '빈손'이 버텨낸 현실
"내일 출근하기 진짜 싫다. 그래도 어쩌겠어, 버텨야지."
일요일 밤, 먼지만 남은 연금 계좌를 황급히 닫고 월요일 아침의 알람을 맞추는 가장들의 어깨는 천근만근이다. 집값은 올랐다지만, 단단한 아파트 벽돌이 내 노후의 따뜻한 점심 식사를 현금으로 내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무리하게 퇴직금을 헐어 집을 샀다는 자책감의 수렁에 빠질 필요는 없다.
미친 듯이 요동치던 부동산 시장의 공포 속에서, 가족이 두 다리 뻗고 쉴 수 있는 단 하나의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 당시 가장이 내릴 수 있었던 가장 치열하고 절박했던 방어전이었음을 우리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다만 인정할 것은 냉정하게 인정해야 한다. 완전히 멈춰버린 은퇴 시계의 태엽을 다시 감기 위해선, 내일부터라도 텅 빈 계좌를 직시하고 단돈 10만 원이라도 다시 작은 눈덩이를 뭉치기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거실 소파에 앉은 가족들의 평온한 주말 이면에는, 당신의 텅 빈 퇴직금 계좌가 버텨낸 고단한 희생이 녹아 있다. 오늘 밤, 대한민국 모든 40대 가장들의 눈물겨운 '빈손'에 무거운 경의를 표한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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