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기고

[기고] 국가가 준 연구비는 '공동 자산'이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5.17 18:38

수정 2026.05.17 18:38

권석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원장
권석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원장

우리 연구 현장에서 흔히 들리는 말 중 하나가 "연구비를 땄다"는 표현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과제를 확보한 연구자의 기쁨과 노고가 담긴 말임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따다'라는 동사는 위험하다. 그 안에는 연구비를 승자의 전리품이나 개인 소유물로 여기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 년간 연구과제중심제도(PBS)는 연구자를 생존 경쟁으로 내몰았다.

과제를 확보하지 못하면 인건비조차 감당되지 않는 구조 속에서 연구자들이 "내 연구비로 산 장비는 내 것"이라는 폐쇄적 랩 중심주의에 빠져든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 불가피함이 PBS 제도가 폐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용인될 이유는 없다. 대규모 데이터와 복합 기술이 결합되어야만 성과를 낼 수 있는 과학 세계에서 '개인 혹은 부서 중심주의'는 혁신의 가장 큰 장벽이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이 주도하는 유전자·세포치료 분야의 성과는 이 점을 명확히 증명한다. 한 연구팀이 제안하고 국가가 수용한 연구 자금은 그 팀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기관 전체의 데이터 분석 인프라, 다른 팀의 공정 기술, 그리고 AI 전문가와 생물학자 간의 데이터 공유가 결합되면서 비로소 치료제 개발의 속도가 단축되었다. 연구비를 '공동 자산'으로 인식했을 때 가능했던 시너지였다.

연구비의 본질은 무엇인가. 연구자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국가와 사회가 가치 있다고 판단해 세금을 위탁한 것이다. 보상이 아닌 미래를 위한 투자이며, 연구자는 그 투자를 집행하는 국가 대리인이다.

이 인식 전환은 연구 현장의 문화 자체를 바꾼다. 연구비 집행은 국민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과정이 된다. 고가 분석 장비를 구매할 때도 '나만 쓸 도구'가 아니라 '대한민국 과학기술 생태계의 공동 자산'이라는 책임감이 수반된다. 정부출연구기관이 연구 장비를 외부 기업과 대학에 개방하는 것은 그 책임감의 실천이다.

정부는 최근 연구기관의 공공기관 지정 해제, 예비타당성 조사 폐지, 연구혁신비 신설 등을 통해 연구 현장의 자율성을 대폭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자율이 성과로 이어지려면 연구자 스스로 책임을 내면화해야 하고, 제도는 그 책임의 이행 여부를 신뢰를 기반으로 확인해야 한다.

정부에도 요청이 있다. 연구자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임무 중심으로 과제를 기획하고, 협력을 구조적으로 유인하며, 장기 성과를 추적할 수 있는 평가 체계를 갖추는 것, 그것이 자율 확대에 상응하는 정부의 책임이다. '국가 대리인'이 제 역할을 하려면 위임 구조가 명확해야 한다.

연구자들은 자문해야 한다.
나는 오늘 '연구비를 따기 위해' 실험실에 앉아 있는가, 아니면 '국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혁신을 고민하고 있는가.

연구비를 '수임했다'는 엄중한 책임감이 들어설 때 대한민국의 과학은 추격자의 자리를 벗어나 퍼스트 무버로 거듭날 수 있다. 우리의 연구비는 누군가의 땀방울이 섞인 기회비용이다.
그 끝에 반드시 국민의 건강과 풍요로운 바이오 경제라는 결실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권석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