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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본 모든 사람을 '절친'으로 착각해요"…희귀한 '가짜 기억병' 걸린 50대 女 [헬스톡]

문영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5.20 15:25

수정 2026.05.20 13:36

자료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자료사진. 게티이미지뱅크

[파이낸셜뉴스] 길을 걷다 마주치는 모든 낯선 사람이 오랜 친구나 지인처럼 느껴진다면 어떨까. 영국의 한 여성이 낯선 사람의 얼굴을 볼 때마다 뇌에서 '가짜 기억'을 만들어내는 매우 희귀한 신경 장애를 앓고 있다고 고백했다.

20일 영국 더 미러에 따르면 노스요크셔주 스카버러에 거주하는 제니 패리(54)는 길거리나 카페, 영화관 등에서 마주치는 완벽한 타인들을 볼 때마다 강렬한 친숙함을 느낀다.

이는 '안면 과잉 친숙증(HFF)'이라는 희귀 신경 질환 때문이다. 현재 영국 내에서도 이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과학자들은 여전히 정확한 발병 기전을 연구 중이다.

극심한 편두통 이후 찾아온 불청객

제니에게 처음 증상이 나타난 것은 7년 전인 2019년 가을이었다.

그는 "딸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던 중 극심한 편두통이 찾아왔고, 오른쪽에서 시작된 통증이 왼쪽 머리로 번졌다"면서 "두통이 가라앉은 직후 마주친 낯선 사람을 완벽히 아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미소를 지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타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뇌가 '가짜 기억'을 생성해 낸다"면서 "예를 들어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거나, 과거 직장에서 함께 일했다거나, 심지어 같이 휴가를 다녀왔다는 식의 구체적인 기억이 떠오른다"고 밝혔다.

이러한 증상은 제니의 일상을 무너뜨렸다. 한 번은 길 건너편에 있는 여성을 자신이 수년간 지도했던 서커스 안무가로 착각해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으나, 상대방은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당황한 제니는 근처 카페로 달려가 눈물을 쏟고 말았다.

직장 생활에도 큰 타격을 입었다. 두통 발병 직후 유명 관광지의 안내 데스크에서 일하게 된 제니는, 고객들의 얼굴을 보고 재입장 여부를 확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모든 방문객이 '아는 사람'으로 보였고, 결국 입장 확인표가 없는 사람들까지 모두 무료로 통과시키는 실수를 저질렀다.

'왕좌의 게임' 시청 실험이 밝혀낸 뇌의 비밀

제니의 사례는 영국 요크 대학교와 미국 다트머스 대학교의 공동 연구진을 통해 그 원인이 일부 밝혀졌다. 연구진은 제니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드라마 '왕좌의 게임' 클립을 시청하게 한 뒤 뇌의 활동을 추적(신경 영상 촬영)했다. 그 결과를 해당 드라마의 '열성 팬' 그룹, 그리고 '전혀 모르는' 그룹과 비교했다.

분석 결과 제니가 등장인물을 전혀 모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뇌 속 기억 중추인 해마는 드라마의 열성 팬들과 거의 동일하게 활성화되었다.

요크 대학교 심리학과의 팀 앤드루스 교수는 "제니의 기본적인 안면 인식 시스템은 완벽하게 정상이다"라며 "문제는 시각 시스템과 기억 시스템 간의 소통이 과장되면서 발생한다. 낯선 사람을 볼 때 침묵해야 할 뇌가 '이 사람을 알고 있다'는 강력한 거짓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제니는 사람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친구들을 만날 때도 얼굴 대신 반지나 머리 길이, 반려동물 등 다른 단서를 통해 사람을 알아본다.

안면 과잉 친숙증(HFF) 치료법은 있나

안면 과잉 친숙증은 친숙한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안면실인증(안면인식장애)'의 정반대 개념으로, 일면식이 없는 타인의 얼굴을 보고 강렬한 친숙함을 느끼는 희귀 신경학적 증후군이다.

뇌의 시각 정보 처리 영역과 기억 및 감정을 담당하는 측두엽(해마 등) 간의 신경망 연결에 이상이 생기거나 비정상적으로 과활성화될 때 발생한다. 주로 뇌전증(간질), 편두통, 혹은 뇌 손상 등의 기저 질환과 동반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처음 보는 사람을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등 지인으로 강하게 착각하게 만든다. 낯선 사람과 식사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등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거짓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낸다.

잦은 착각으로 인해 타인과 오해가 발생하며, 이로 인해 대인관계 위축, 우울감, 사회적 불안증이 동반되기 쉽다.


현재 HFF 자체만을 표적으로 완치하는 약물은 없다. 증상을 유발한 근본적인 신경학적 원인(편두통, 뇌전증 등)을 파악해 해당 질환에 대한 약물 치료를 진행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와 더불어, 환자가 사람의 얼굴 대신 옷차림, 장신구, 목소리 등을 활용해 타인을 식별할 수 있도록 돕는 인지 행동 치료(CBT)와 심리적 지원이 병행된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