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한 방울 없어도… 탄수화물과 액상과당이 간세포를 기름으로 채운다 오후 3시, 쏟아지는 지독한 만성피로는 '질식해 가는 간'의 절박한 구조 신호
[파이낸셜뉴스] 직장인들의 점심시간. 오전 내내 쌓인 스트레스를 땀으로 빼보겠다며 얼큰한 짬뽕 한 그릇을 비워낸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건강을 생각한답시고 몇 달 전부터 그 좋아하던 커피와 탄산음료도 독하게 끊어냈다. 대신 맵고 짠 속을 달래기 위해 냉장고에서 시원하고 달달한 '과일 음료' 하나를 꺼내 마신다.
술도 마시지 않았고 카페인과 탄산도 피했으니, 치열하게 오전 업무를 버텨낸 내 몸에 꽤 훌륭하고 건강한 보상을 했다는 씁쓸한 뿌듯함마저 든다.
하지만 오후 3시.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몸이 물먹은 솜처럼 바닥으로 꺼지는 듯한 끔찍한 피로감이 덮친다.
방금 점심으로 삼킨 그 짬뽕과 달콤한 과일 음료가, 당신의 간을 기름이 꽉 들어찬 '푸아그라(거위 간)'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 팩트다.
'지방간'이라고 하면 으레 매일 밤 소주를 들이켜는 주당들의 전유물로 여긴다. 하지만 현실의 통계는 전혀 다른 곳을 가리키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보건의료빅데이터에 따르면, '비알코올성 지방간(NAFLD)'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는 2017년 약 28만 명에서 2021년 40만 명을 훌쩍 넘기며 폭발적으로 급증했다. 대한간학회 등 전문 의료계는 이미 국내 성인의 약 30%가 지방간을 앓고 있으며, 이들 중 무려 80%가 알코올과 무관한 '비알코올성'이라는 충격적인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간은 우리 몸의 거대한 화학 공장이자 침묵의 장기다. 술을 단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아도, 짬뽕 면발에 가득한 '정제 탄수화물'과 달달한 음료에 농축된 '액상과당'은 소화 과정을 거쳐 간으로 직행한다. 우리 몸은 에너지로 쓰고 남은 잉여 포도당과 과당을 모조리 중성지방의 형태로 변환해 간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거위에게 강제로 옥수수를 먹여 간을 비대하게 만드는 것과 완벽하게 동일한 기전이다. 술자리에서 콜라를 마시며 간을 지켰다고 안도하던 4050 남성들의 간세포 사이사이에, 샛노란 기름이 소리 없이 끼어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후 3시마다 찾아오는 그 지독한 만성피로는 결코 단순한 식곤증이 아니다. 간에 지방이 5% 이상 침착되어 굳어지기 시작하면, 간 본연의 기능인 독소 해독과 에너지 대사 능력이 치명적으로 떨어지게 된다. 즉, 영문도 모른 채 쏟아지는 그 무기력함은 노화의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겹겹이 쌓인 기름에 짓눌려 질식하기 직전인 당신의 간이 보내는 처절한 '구조 신호'인 셈이다.
건강을 지켜보겠다며 억지로 커피를 참아내고, 탄산 대신 달콤한 과일 음료를 쥐었던 대한민국 4050의 뼈아픈 오답노트. 치열하고 팍팍한 하루를 버티기 위해 스스로에게 허락했던 그 소박한 위로들이, 사실은 침묵의 장기를 서서히 돌덩이처럼 굳게 만들고 있었다.
당신의 간은 지금, 당신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상태일지 모른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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