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변기 위 30분의 도피처… 숏폼 알고리즘이 찢어버린 은밀한 혈관 "피곤해서 터졌다"는 착각… 중력과 스마트폰이 만든 끔찍한 합작품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굴욕… 수술대 위 4050의 눈물
[파이낸셜뉴스] 수요일 밤 10시. 일주일의 피로가 목끝까지 차오르는 마의 시간이다.
저녁 식사를 마친 40대 가장 김 부장은 조용히 안방 화장실로 향한다. 사실 배가 아픈 것은 아니다. 그저 아내의 잔소리와 아이들의 소음을 피해, 문을 걸어 잠그고 온전히 혼자 쉴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가 필요했을 뿐이다. 차가운 변기 위에 자리를 잡고 스마트폰을 켠다.
슬슬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습관적으로 힘을 주고 일어선 순간, 변기 안을 내려다본 김 부장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맑아야 할 변기 물이 새빨간 피로 흥건하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대장암'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치며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하지만 병원을 찾아 내시경을 받고 굴욕적인 자세로 진찰대에 누운 그에게 의사가 건넨 진단명은 암이 아니었다. 직장인들의 고질병이자 수치심의 대명사, '치핵(치질)'의 파국이었다.
대한민국 4050 남성들은 하루 종일 엉덩이를 혹사당한다. 출퇴근길 차 안에서, 하루 10시간 넘는 사무실 파티션 안에서 끊임없이 의자에 결박당해 있다. 이렇게 짓눌린 엉덩이 혈관은 퇴근 후 화장실 변기 위에서 치명타를 맞는다.
인간의 직립보행은 필연적으로 항문 쪽으로 중력을 쏠리게 만든다. 우리 몸은 배변 시 항문이 다치지 않도록 일종의 푹신한 혈관 쿠션(정맥총)을 덧대어 놓았다. 그런데 가운데가 뻥 뚫린 변기 위에 앉아 스마트폰에 정신이 팔려 20~30분씩 멍하니 힘을 주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 항문 쪽으로 피가 쏠리며 압력이 극도로 높아지고, 얇은 점막 아래에 있던 이 혈관 쿠션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다 결국 찢어지며 선혈을 쏟아내는 것이다.
단순히 피곤해서 생긴 해프닝이 아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에 따르면 국내 치핵 수술 건수는 매년 백내장, 제왕절개와 함께 전체 수술 건수 '톱 3'를 다툰다. 연간 60만 명이 넘는 환자가 항문 질환으로 병원을 찾으며, 이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4050 중년층이다. 매일 앉아서 버텨야 하는 치열한 밥벌이의 고단함과, 화장실 변기 위에서 스마트폰 불빛에 의지해 찰나의 휴식을 갈구했던 짠한 습관이 합작해 낸 명백한 '물리적 혈관 붕괴'인 셈이다.
생명에 지장을 주는 병은 아니지만, 환자가 겪는 신체적·심리적 굴욕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며칠 전부터 느껴지던 묵직한 이물감과 찢어질 듯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연고만 바르며 고통을 참아낸다. 회식 자리에서 술을 거절할 명분조차 찾지 못해 속을 끓이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수술대에 올라 항문을 도려내는 끔찍한 고통을 겪고 나서야 이 은밀한 전쟁은 끝이 난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하루 종일 의자에 몸을 묶어두었던 4050 가장들. 그들이 유일하게 숨통을 트려 했던 한 평 남짓한 화장실 변기 위에서, 몸의 가장 은밀하고 연약한 곳이 비명을 지르며 터져버렸다. 새빨갛게 물든 수요일 밤의 변기는, 어쩌면 팍팍한 현실을 묵묵히 버텨내다 속으로 곪아 터져버린 대한민국 중년 남성들의 가장 서글프고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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