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조엔 쏟아붓고도 한 달만에 160엔 복귀
【파이낸셜뉴스 도쿄=서혜진 특파원】엔화 가치가 다시 급락하며 달러당 160엔선을 넘어섰다.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BOJ)이 11조엔(약 104조8278억원)이 넘는 자금을 투입해 환율 방어에 나섰지만 효과는 한 달도 지속되지 못했다. 해외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엔화가 저평가됐다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엔고에 대한 기대가 사실상 사라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부 글로벌 투자자는 달러당 170엔까지 엔화 약세가 진행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해외 투자자들 "엔화 매수 의지 사라져..170엔 갈수도"
4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3일(현지시간) 뉴욕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장중 한때 달러당 160.09엔까지 상승했다.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BOJ)은 당시 외환시장에 개입해 엔화를 매수하고 달러를 매도하는 방식으로 약 11조7349억엔 규모의 시장 개입을 단행했다. 이는 2024년 7월 이후 약 1년 9개월 만의 개입이자 역대 최대 규모였다.
개입 직후 엔·달러 환율은 한때 155엔대까지 하락하며 엔화 강세를 보였지만 이러한 흐름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약 1개월 만에 환율은 다시 160엔대를 회복하며 개입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시장에서는 일본 당국의 개입 의지에도 불구하고 엔화 약세를 유발하는 구조적 요인이 여전히 우세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특히 해외 투자자들이 엔화 강세에 베팅하는 전략 자체를 사실상 철회하고 있다는 점이 핵심 변수로 꼽힌다.
미국 뱅크오브아메리카(BofA)의 외환·금리 전략가 아다르시 신하는 최근 유럽 기관 투자자들과의 투자 설명회(IR) 결과를 소개하며 "유럽 투자자들은 다시 엔화를 매수하려는 의지가 거의 없었다"고 전했다.
그는 시장 내에서 엔화 매수 전략이 '밸류 트랩(Value Trap·가치 함정)'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엔화가 저평가돼 있다는 인식은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반등 없이 손실만 누적되는 자산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는 의미다.
오히려 일부 투자자들은 개입을 엔화 매도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미국 자산운용사 뱅가드에서 국제채권 부문을 총괄하는 아레스 쿠트니는 "환율 개입으로 엔화가 일시적으로 강세를 보였을 때 달러 매수·엔화 매도 포지션을 확대했다"고 말했다.
그는 BOJ가 이달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추가 금리 인상에 나서더라도 이후 인상 속도는 6개월에 한 번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쿠트니는 "그 정도 속도로는 엔화를 의미 있게 지지할 수 없다"며 "엔화가 달러당 170엔까지 약세를 보일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엔저 배경엔 미일 금리 격차·BOJ 신중 기조·이란전 장기화
엔화 약세 배경에는 일본과 미국 간 금리 격차가 여전히 크다는 점이 자리하고 있다. BOJ가 지난해 마이너스 금리를 종료한 이후 점진적인 금리 인상을 이어가고 있지만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지적이 많다고 닛케이는 전했다.
우에다 가즈오 BOJ 총재는 전날 도쿄 강연에서 "금리 인상 여부를 충분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며 오는 15~16일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추가 인상 가능성을 시사했다. 현재 0.75%인 정책금리를 1.0%로 인상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다만 시장에서는 BOJ가 물가 상승과 경기 둔화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만큼 공격적 긴축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있다.
해외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BOJ는 항상 인플레이션 대응에 뒤늦다"는 인식도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우에다 총재 발언 직후 엔화는 일시 반등했지만 곧바로 상승분을 반납했다.
글로벌 투자자들의 위험자산 선호 심리도 엔저를 부추기고 있다. 인공지능(AI) 관련 주식 상승세 속에서 저금리 통화인 엔화를 빌려 미국 주식과 채권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가 다시 확대되는 모습이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투기세력의 엔화 순매도 포지션은 11만4667계약으로 약 1조4000억엔 규모다. 이는 일본 정부 개입 이전 수준을 웃도는 동시에 2024년 7월 이후 최대 규모다.
미국과 이란 간 갈등 장기화도 엔화 약세 압력을 키우고 있다. 양국은 지난 4월 휴전 합의 이후 협상을 이어가고 있지만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이에 따라 글로벌 시장에서는 안전자산 선호로 달러 매수세가 강화되는 반면 고유가에 따른 무역수지 악화와 재정 부담 우려로 엔화 매도 압력이 이어지고 있다.
한 외환시장 관계자는 "현재 시장 분위기는 '엔화가 오르면 매도 기회'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라며 "환율 개입만으로는 엔저 흐름을 되돌리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sjmary@fnnews.com 서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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