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꽃과 노인, 사유의 시선… 생로병사를 관조하다[Weekend 문화]

유선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6.05 04:00

수정 2026.06.05 04:00

학고재 갤러리 이종구 개인전 '사유'
농민 초상 그렸던 80년대 민중미술 작가
반가사유상을 작업의 핵심이미지로 활용
불꽃·병든육체 등과 배치 '불이사상' 표현
인간 유한성 자각하며 존재의 본질 고찰

이종구 '사유' 전시 전경
이종구 '사유' 전시 전경
이종구 작 '사유_생로병사2' 학고재 제공
이종구 작 '사유_생로병사2' 학고재 제공
불길과 물결, 병든 몸과 침묵하는 불상이 한 화면에 놓여 있다.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형상들은 충돌하기보다 오래 바라보게 만든다. 현실은 여전히 소란스럽고 인간의 몸은 유한하지만, 화면은 그 비극을 과장해 외치지 않는다. 대신 깊은 침묵 속에서 묻는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으며, 어떤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가.

1980년대 민중미술의 중심에서 농민과 농촌의 현실을 집요하게 응시해온 이종구 작가가 동시대의 폭력과 불안,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사유'라는 화두로 확장해가는 과정을 조명한 전시를 서울 종로에서 개최한다.

학고재 갤러리는 삼청동 본관과 온라인 전시장 '학고재 오룸'에서 오는 7월 4일까지 이 작가 개인전 '사유(Pensive) 思惟'를 연다고 4일 밝혔다.

이 작가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사회적 리얼리즘의 한 축을 구축해온 작가다. 그는 정부미 쌀 포대 위에 농민의 초상을 그려 넣으며 산업화와 도시화의 그늘에 가려진 농촌 공동체의 현실을 정면으로 드러냈다. 농민의 주름과 투박한 신체, 척박한 농촌 풍경은 근대화의 이면을 통과해온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증언하는 장면이 됐다. 이번 전시에서 이 작가는 외부 현실을 향하던 시선을 인간의 몸과 내면, 생명과 죽음의 문제로 돌린다. 코로나19로 인한 단절과 폐쇄, 병과 수술을 겪으며 마주한 죽음의 감각, 대학 교수직 정년퇴임이라는 삶의 전환점은 그의 작업을 보다 근원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다.

걷기와 사찰 순례를 통해 몸으로 사유하는 시간을 통과한 이 작가는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서 마주한 반가사유상을 작업의 핵심 이미지로 끌어들였다. 전시의 중심에는 반가사유상이 있다. 그러나 그의 화면 속 반가사유상은 종교적 도상이나 초월적 존재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은 혼란한 현실을 묵묵히 바라보는 '사유의 시선'이며,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감내하는 존재의 태도다.

이 작가는 반가사유상의 형상 곁에 불꽃, 물결, 병든 육체, 군중, 나체의 인물 등을 병치한다. 이를 통해 성과 속, 정신과 육체, 삶과 죽음, 고통과 평화가 분리된 것이 아닌 서로 의존하며 순환한다는 불교의 '불이 사상(不二 思想)'을 회화적으로 구현한다.

'사유_불'에서는 여러 각도로 배치된 반가사유상이 하나의 세계 안에서 복수의 시선으로 등장한다. 화면을 채운 불꽃은 한국 현대사의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화염이면서 동시에 번뇌를 태우고 지혜를 밝히는 광배의 빛으로 읽힌다. 세속의 비극적 불길이 깨달음의 빛으로 전환되는 역설적 장면이다. '사유_예토(팔레스타인)'는 이러한 사유를 동시대의 비극으로 확장한다. 불교에서 번뇌와 고통이 가득한 현세를 뜻하는 '예토'는 전쟁과 학살로 신음하는 팔레스타인의 현실과 겹쳐진다. 과거 한국 사회의 모순과 민중의 삶을 기록했던 그의 비판적 정신은 이제 국경과 인종을 넘어 고통받는 인류 전체를 향한 연대로 확장된다. 격렬한 비극의 현장과 고요한 사유의 이미지를 한 화면에 충돌시키면서도 감정적 과잉 대신 절제된 침묵을 택한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나체 역시 중요한 장치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의 재현이 아닌 사회적 지위와 권위, 욕망의 외피를 벗어낸 인간 존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숭고하고 영원한 반가사유상의 형상과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의 몸이 나란히 놓일 때, 초월과 현실은 서로 다른 차원이 아닌 하나의 실존으로 연결된다.

'사유 생로병사 2'는 그가 병고와 수술을 겪으며 마주한 경험에서 비롯된 작업이다. 변화한 신체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이 작품은 삶의 유한성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완전한 몸이야말로 인간이 세계를 감각하고 기억하며 사유하는 가장 구체적인 무대임을 보여준다. '나무' 연작에서는 이러한 사유가 일상의 풍경으로 확장된다.
거대한 나무 아래 아이와 중년, 휠체어에 앉은 노인의 모습은 생로병사의 시간을 한 폭의 풍경처럼 펼쳐낸다.

학고재 측은 "이 작가의 회화는 특정 종교의 교리를 설명하거나 하나의 사건을 직접 지시하지 않는다"며 "대신 형상과 형상 사이의 간극을 통해 관객이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장을 연다"고 밝혔다.
또 "'무무명', '불이', '예토', '항마촉지'와 같은 제목들은 불교적 개념을 경유하지만, 그 의미는 동시대의 전쟁과 재난, 혐오와 갈등, 인간의 유한성과 존엄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고 설명했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