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포럼] 과학기술 외교력이 국가 경쟁력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6.08 19:04

수정 2026.06.08 20:07

문애리 한국여성과학기술인 육성재단 이사장
문애리 한국여성과학기술인 육성재단 이사장
지난달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제11회 유엔 과학기술혁신(STI) 포럼'이 열렸다.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주관 포럼은 2030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달성을 위해 과학기술의 역할을 논의하는 국제 무대다. 올해도 전문가 500여명이 기후위기, 빈곤, 청년창업, 기술격차 등 복합과제를 논의했다.

필자는 유엔 과학기술 전문가그룹 위원으로 '물 시스템 전환' 세션과 '청년창업 지원' 특별세션에 패널로 참여했다. 물 부족 문제 논의 중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의 물 소비가 주요 의제로 떠올랐다.

빅테크 데이터센터의 막대한 냉각수 사용으로 일부 지역의 식수 공급까지 우려된다는 내용이었다. 기후와 빈곤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AI 인프라 문제가 핵심 의제로 다뤄진 장면은 상징적이다. 과학기술이 산업과 연구 영역에 머물지 않고 국제질서와 외교·안보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확장됐음을 보여준다.

과학과 외교가 맞물려 움직인 역사는 오래됐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핵무기 개발 후 핵 비확산 논의의 문제의식과 근거를 제공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는 백신이 외교 수단이 됐다. 2021년 이스라엘은 시리아에 스푸트니크V 백신 비용을 지불하고 억류된 자국민을 돌려받았다. 백신이 적성국과의 협상에서 외교 카드로 활용된 사례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외교를 보조하는 수단을 넘어 국제질서를 움직이는 권력이 됐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스타링크는 전장 통신망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고, TSMC의 반도체 생산 역량은 미중 전략경쟁의 핵심 변수로 거론된다. 유전체 데이터는 안보자산으로 분류되고, 반도체 공급망 재편은 국가 간 연구협력까지 흔들고 있다. 첨단기술은 이제 경제와 안보, 외교를 동시에 움직이는 전략자산이다.

이런 시대에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에서 앞서려면 기술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국제 의제를 선점하고,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연구 성과를 세계의 규범과 표준으로 연결하는 힘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과학기술 외교력이다.

2023년 서울에서는 노벨상 수상자들과 청소년들이 대화하는 '노벨프라이즈 다이얼로그'가 열렸다. 필자는 조직위원장으로 참여하며 스웨덴 등 여러 나라가 수십년간 구축한 글로벌 과학 네트워크의 힘을 실감했다. 일본의 노벨과학상 수상자 27명 배출 배경에도 연구 투자뿐 아니라 국제사회와 연결해 온 시간의 축적이 있다. 우리에게도 그런 축적이 필요하다.

그 연결의 시간을 한국도 이제 본격적으로 쌓아가야 한다. 우리 연구자들이 국제 회의장을 더 자주 찾아야 하고, 한국 과학기술의 성과가 세계의 언어로 더 폭넓게 오가야 한다. 과학기술외교는 선언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자리에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사람이 꾸준히 나타나야 한다.


기술패권 시대의 경쟁은 더 많은 기술을 개발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기술의 규칙과 표준을 누가 만들고, 어떤 가치와 방향으로 이끌어 가느냐의 경쟁으로 이어진다.
과학기술이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시대라면 과학기술 외교력은 곧 국가 경쟁력이다.

문애리 한국여성과학기술인 육성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