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논단] ‘정책’이라 썼더니 ‘규제’로 읽는다

박경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4.03 17:12

수정 2014.10.29 00:01

[fn논단] ‘정책’이라 썼더니 ‘규제’로 읽는다

38년 전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무원이 됐다. 박봉의 공무원이라 주머니는 얇았지만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사무관 때 백지에 기안을 하면 그것이 정책이 되고 법령이 되는 것을 보고 일하는 보람을 느꼈다. 물이 강둑을 따라 흘러가듯 정부가 기본방향을 제시하면 경제도 사회도 이에 따라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지난주 최문기 장관이 진작 규제개혁을 할 수 있었는데 국민을 불편하게 했다며 "너무 부끄러웠다"고 고개를 떨구는 모습을 보며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정부가 모든 것을 주도하던 시대는 가고 사회의 다양한 조직과 기관이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정치문화도 다양해졌다. 진보 정당과 보수 정당이 번갈아 권력을 잡는 현상이 생기게 되니 정책방향도 정권에 따라 바뀌게 된다. 헌법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공무원은 정치와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 공무원은 대통령의 의지를 구현할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하고 시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권은 국민이 선택하는 것이다. 공무원은 어떤 정권이든 국민이 선택한 정권의 철학으로 무장하고 이를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해야 한다.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라는 자조적인 말도 있지만 공무원은 정책 기술자일 뿐이다. 모든 규제는 사실상 정책의 산물이다. 좋은 안이라고 생각해 정책을 만든 것인데 지금 와서 규제라고 손가락질을 받는 것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타파해야 할 규제 중 가장 큰 욕을 먹고 있는 것이 공인인증서라고 하니 다소 안심이 된다. 공무원이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 도입한 터무니없는 제도가 아니라 전자상거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만든 제도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규제는 건축·위생·환경·소방에 관한 것 같다. 건물을 지은 후 준공검사를 받지 않아도 되면 어떻게 될까? 위생검사, 소방검사는 꼭 필요한 것인가? 나라가 취약할 때는 이 모든 규제가 필요한 것이었지만 나라가 어느 정도 발전하면 시장에 맡겨둬도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위생 상태가 좋지 않으면 누가 그 가게에 오겠는가? 요즘은 화재도 많지 않으니 소방검사도 생략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건축법에 의한 규제가 없더라도 건축가들이 쾌적하고 안전한 건물을 짓지 않을까?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필자도 젊은 사무관 시절에 규제 완화를 해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수입품과 관련 각 부처가 사전 허가를 요하는 제도를 고쳐보려고 한 것이다. 사전 허가 때문에 통관이 지체된다는 무역업계의 불만을 시정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래서 식품안전법, 농산물종자법 등 수십 개의 법률을 분석해 봤다. 분석 결과 국산품과 수입품에 대한 요구사항이 다르다는 것이 나타났다. 국산품에 대해서는 위반 사항이 적발될 때만 조사와 조치를 취하는데 수입품은 사전에 전량 필수 조사를 실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 각 부처를 방문, 수입품에 대해서도 위반사항이 적발될 때만 조사와 조치를 실시해 과도한 규제를 완화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각 부처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국산품이야 전국에 있는 사업장의 필수 조사를 할 수 없지만 수입품은 통관 항구만 지키면 되므로 필수 조사가 가능하고 문제가 생기기 전에 문제를 예방하는 것이 좋다는 논리였다.

박 대통령은 정치력이 뛰어난 지도자인 것 같다. 어떤 정책도 그 정책이 정치화되지 않으면 국민의 가슴에 남을 수 없다. 박 대통령은 규제개혁을 정치 언어화하는 데 성공했다.
다행인 것은 규제 1만5000건 중 20%만 감축하기로 한 것이다. 80%의 규제는 현명한 정책이라고 인정된 것 같다.
전직 공무원으로서 안도의 숨을 내쉰다.

김의기 법무법인 율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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