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샐러리맨에서 기업가로] (2) 김재철 에스텍파마 대표

김승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0.07.01 18:16

수정 2010.07.01 18:16

“아버지께서 두 차례 사업에 실패하시면서 약수동(서울)의 번듯한 한옥집에서 살던 식구들은 갑자기 마장동의 청계천변 판잣집으로 이사를 가야 했죠. 청계천이 복개되기 전이라 비가 오면 집안에 들어온 물을 퍼내기 일쑤였고 특히 넘치기라도 하면 짐을 싸서 대피한 적도 많았습니다. 게다가 주변이 온통 판잣집이라 불이라도 나는 날이면 전쟁터였죠. 지금 생각해 보면 불은 왜 그리 많이 났는지…. 우리 집이 아닌 강 건너 불구경만 하는 날은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던 때가 있었죠.(웃음)”

가난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던 청년은 인간과 삶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낸 독일작가 헤르만 헤세의 글 ‘지와 사랑’을 몇 번이나 탐독하고 또 자신의 인생을 고민하며 문학에 푹 빠져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기술을 배워야 먹고산다는 아버지의 말에 그는 두말 하지 않고 대학에서 화학과를 지원했다.

■사사건건 발목 잡는 회사

대학을 졸업한 에스텍파마 김재철 대표(51·사진)는 선배의 소개로 당시 화장품을 중심으로 식품, 제약 등 계열사를 두고 있던 국내의 한 대형 화학회사에 취직했다. 82년 3월이다.


“회사의 제일 큰 부문이 화장품 사업부였고 또 지원을 그쪽으로 한 터라 당연히 화장품 연구소로 배치될 줄 알았다. 그런데 제약사업부 쪽에 가기로 했던 신입직원이 입사를 포기하는 바람에 내가 그쪽 부서에 배치됐다. 그후 1년쯤 지나니 제약부문을 분리, 독립시켰다. 화장품회사에 입사했는데 제약회사에서 일하게 됐다.”

일이 이렇게 되자 아예 당시 업계에서 잘나가던 ○○양행, ○○당 등 대형 제약사로 옮길까도 고민해 봤다. 그러나 처음 시작한 곳에서 뭔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김 대표를 붙잡았다.

“분석연구팀에서 신입 연구원 생활을 할 때였다. 한번은 불에 타는 모기향을 수거해 검사를 하다 보니 불에 쉽게 타지 않는 단점을 가진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발명한 것이 모기향 착화제였다. 그리고 특허도 냈다. 특허까지 내고 실용화만 시키면 됐는데 회사에서 돌아온 답이 힘을 빠지게 했다. 공장 설비를 추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결국 모기향 착화제는 상품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의 회상이다.

회사가 당시 대리급이었던 김 대표의 발목을 잡은 것은 이뿐만 아니었다.

독립한 뒤 회사를 맡는 최고경영자들마다 영업만 강조했다. 그러다 보니 연구소 투자는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연구원이 영업을 한 번 해보자고….

김 대표는 “내가 만든 제품을 영업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생각이었다. 누구보다도 거래처에 제품을 잘 설명할 수 있고 또 연구원이 직접 영업을 하니 신뢰감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영업이 생소했지만 조금씩 성과도 나왔다”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회사였다. 내부 지원은커녕 설비투자를 통해 생산량을 늘리는 것이 불가능해 어렵게 따온 주문을 취소까지 했던 것이다. 또 연구원이 필요하다는 말에 회사에 친구를 소개해 줬지만 회사가 계획을 취소하는 바람에 친구 볼 면목도 없어졌다.

그러나 첫 직장에서 다양한 시도를 해가며 마음을 붙이려고 해 봤지만 끊임없이 실망만 안겨준 회사는 점점 김 대표와 멀어져 갈 수밖에 없었다.

■전화위복 그리고 비상(飛翔)

사업을 하며 고생을 했던 아버지 모습이 뇌리에 강하게 남아 김 대표 역시 퇴사를 할 때만 해도 사업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활용해 중소기업들과 협력하면 원료 대부분을 해외에 의존하는 우리 제약업계의 무역역조 현상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기술투자는 안하고 눈앞의 돈벌이만 생각하는 기업들이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아예 직접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러나 쉬우면 그게 어디 사업이랴. 연구만 할 줄 알고 기술 개발에만 신경 쓰면 될 줄 알았지만 어음도, 세금계산서도, 각종 행정처리도 손수 해야 했다. 남녀 직원 한명씩을 데리고 서울 포이동에 사무실 겸 실험실을 차려놓고 모자란 실험기구는 친구 실험실을 찾아다니며 원료 의약품 실험에 매달렸다. 그러다 월세를 내는 임대공장을 얻은 것이 96년도. 당시 직원은 김 대표를 포함해 고작 5명이었다.

첫 작품은 위궤양 치료제였다. 이후 간염 치료제, 소염진통제, 빈혈 치료제 등도 순차적으로 개발했다.

기술개발은 가시적인 성과를 보였지만 위기가 닥쳤다. 설비투자를 위해 대출받기로 약속했던 은행이 대출 예정일 이틀 전에 IMF 여파로 문을 닫은 것. 앞이 깜깜했다.

그러나 위기와 함께 기회도 찾아왔다. 높아만 가는 원·달러 환율에 상대적으로 에스텍파마가 개발한 원료 의약품이 가격경쟁에서 해외업체들을 능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결국 에스텍파마가 경기 안산에 공장(2000년)을 짓고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초기 원동력이 됐다.

물론 국내의 한 대형 제약회사 의뢰로 2년간 공들여온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가 취소를 당한 경험, 세계적 제약사 두 곳과 신약 개발을 진행하다 동시에 취소 통보를 받은 쓰라림 등 중대 위기에 처했던 시기도 있었다.

김 대표는 “남이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은 사업을 해선 안된다. 특히 도전정신이 없는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사업을 하는 것이 샐러리맨 생활보다 몇 배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내가 해 보고 싶은 것을 하고, 또 부족하면 더 노력해 성취하는 것이 사업의 묘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임직원 수 100명, 올해 예상 매출액 450억원, 2008년 완공한 첨단시설의 경기 향남 공장, 일본·유럽·남미 등에 이은 미국 시장 진입, 중국 대형 의약그룹과 합작을 통한 의약 완제품 시장 진출,이란 지역을 중심으로 자기공명촬영장치(MRI) 조영제 중동 시장 진출 가시화 등 원료 의약품 제조사를 일군 김재철 대표와 에스텍파마의 현주소이다.

■그의 삶과 경영철학

김 대표는 요즘 한 달에 두세 차례 직원들과 야구를 하는 것에 흠뻑 빠져 있다. 자신이 단장 겸 투수다. 또 회사 전 직원이 수영 강습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도 해준다. 직원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그들의 건강까지 직접 챙긴다.

과거 직장생활 경험은 경영자가 된 지금 타산지석이 되고 있다. 박사과정을 끝내지 않고 회사에 입사한 직원의 미래를 생각해 그를 내보내기 위해 스트레스를 줬고 결국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한 뒤 나중에 회사로 재취직시킨 경우도 있다.
또 업무에서 과실이 발생했을 때 책임을 먼저 묻기보다는 개선 가능성에 우선 순위를 두는 것, 모든 책임은 경영자가 지는 자세, 동종 회사들과 경쟁하지만 제살깎기가 아닌 상호협력을 통한 시너지효과 창출 등이 김 대표의 경영 방침이자 철학이다.

김 대표는 “경쟁사들과 파트너십을 통해 ‘1+1=3’을 만들어 1.5씩 나눠 갖자는 게 나의 생각”이라며 “그러나 신사적이지 못한 행태와는 과감히 싸울 수 있는 승부근성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온화한 미소 속에 숨어 있는 경영자로서 그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bada@fnnews.com김승호기자

■김재철 대표 약력 △고려대학교 화학과 졸업 △태평양제약 중앙연구소 △에스텍케미칼 대표 △에스텍파마 대표이사(현)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 △환경부 장관 표창 △산업자원부 장관 표창 △지식경제부 장관 표창 △경기중소기업지원센터 이사(현) △코스닥협회 이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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